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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창비의 대응에 대한 단상



"단 하나의 사안을 공백으로 남기기 위해, 영원히 토론하는 100인 동색의 지식인 집단."

이번 가을호 창비와 백낙청 선생의 페이스북 글과 관련한 논란에서 황호덕 선생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따로 또 이와 관련한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창비에서 자신의 주장을 빌미삼을 때 타인의 의도를 짐작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리 타인의 의도(양심)를 들여다볼 수 있다. 대충 이런 입장인데, 이는 전형적인 관심법(觀心法)이죠. 누군가를 옹호하기 위해 그 마음을 들여다본 이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글에 깔린 사악한 의도를 알고 있다. 가령, 이렇게 말이죠.

사실 윤지관 선생의 글은 표절이 있는 작품도 훌륭한 작품일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표절은 작품성에 절대적 손상을 입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평적 관점에 따라서는 다른 문학적 결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존중합니다. 용사(用事)와 신의(新意)의 토론이야 이미 천년 이상의 전통을 갖춘 것이니까요. 그러나 두 입장 어디에 서더라도, 그 작품을 작가의 표절 의도 여부에 따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윤지관 선생, 나아가서 창비와 백낙청 선생의 주장은 "의도적 표절이라면 몰라도 무의도적 표절이라면 그 작품은 훌륭한 작품일 수 있다. 또는 훌륭한 작품인데 표절이 있더라도, 그것이 무의도적이면, 과하게 따지지 말라." 정도일까요. 작가의 표절이 의도가 아니라면 작품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 이러한 시각은, 장정일 선생이 시사인 칼럼에서 주장한 것처럼,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작가라는 낭만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문학적 차용 문제를 다루려 한다는 점에서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그 표절의 의도성을 우리는 알고 너희는 모른다는 시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길영 선생의 말처럼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떤 문학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는 게 현대비평의 출발점임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무리수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진 생각(양심)을 들여다보고 판단하는 저울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여기는 것은 권력의 중요한 표지입니다. 신경숙 씨의 표절이, 더 나아가서 그것이 의도적이냐 아니냐가 문학권력 논쟁을 퍼뜨린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권력의 시각으로 문제를 정의하니까 문학권력 논쟁이 불거져 일파만파로 확산된 것입니다.

이전에 블로그 글에서 밝혔듯이, 저는 문학권력 논쟁이 다소 허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비, 문지, 문학동네 등은 공공영역이 아닙니다. 가능한 한 좋은 작품을 출판하면서 사적 이익도 최대한 보위하려고 애쓰는 좋은 기업일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좋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려고 하는 어떤 식품 기업을 우리가 대하듯이, 그 노력에 대한 존중과 함께 사적 이익이 공적 담론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하는 감시가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사실, 그 일은 반드시 문학권력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문학권력이라는 말은 어쩌면 듣는 쪽에서는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사에 대해서 이와 같은 식으로 반응하면, 그 프레임 자체가 진실이 됩니다.

어제부터 하루종일 우울했습니다. 저 역시 현장에서 일을 해왔던 입장에서 한국문학의 침체에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낍니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아직 먼데, 언제 이 불요한 말들이 사그라질지, 정말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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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급하게 쓴 것이지만, 생각의 자료로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