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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발굴의 시대 책장을 정리하면서 뒤늦게 《세계의 문학》 2015년 여름호를 다시 읽는다. ‘독자 발굴의 시대’를 특집으로 하고 있다. 서동욱이 쓴 ‘기획의 말’을 조금 옮겨 둔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고, 편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젠 읽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다행히 씨가 말라 버렸다고 해도 좋을 어설픈 엘리트주의는 독자를 깨우쳐야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독자란 깨우쳐야 할 무지의 계란을 품에 안은 자가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는 자, 자신이 설정한 문제를 위해 책을 구성해 주기를 저자에게 요구하는 자이다. 독자를 발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이란, 저자로부터 독자에게 보물이 뚝 떨어지는 수동적인 수혜의 장이 될 수 없고, 독자의 요구라는 ..
안 팔리더라도 좋은 책을? 나는 "안 팔리더라도 좋은 책"이라는 출판 인터뷰의 키치가 아주 불편하다. 사실, 이런 말은 출판 생태계에서 저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안 팔리더라도 좋은 책을 쓸 수 있다. 왜? 파는 것은 출판사와 서점이 책임질 터이고, 그러지도 못하면 출판될 수 없을 테니까. 자비로 40부를 인쇄해 단 7부가 팔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미래의 책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좋은 책을 내는 것은 출판사의 당연한 의무이며, 출판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아무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출판사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팔리는 책만 출판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출판의 타락일 터이다. 출판의 임무는 따로 있다.저자가 공들여 쓰고 편집자가 정성껏 만든 좋은 책을 독자가 발..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를 추구합니다 (청주 강강술래) 잠든 거인은 저절로 깨어나지 않는다. 낡은 램프는 내버려두면 낡은 램프일 뿐이다. 알라딘이 낡은 옷소매로 문질러 광을 낸 후에야 거인이 풀려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책은 사람 앞에 놓인 램프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눈을 옮기지 않으면, 안에 잠든 거인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도서관은 각종 마법 램프들의 전시장이다. 000번 총류에서 900번 역사에 이르기까지 램프들이 잘 분류된 채로 소원을 들어주려고 알라딘들을 기다리는 중이다.램프에 거인을 잠들게 만든 마법사들은 어떨까. 가끔이라도 램프를 문질러 소원을 빌고는 있는 걸까.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는 법은 드물고, 교사가 자식 가르치는 건 어려운 일처럼 이들 역시 자신을 위한 램프 닦기를 힘겨워할까. 책의 프로페셔널, 즉 저자, 편집자, 평론가, ..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문화일보 서평)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 편집자는 지식 또는 사상의 구조에서 잊힌 좌표로 표시된다. 그것은 근대 출판에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 즉 사상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이자 주체의 결단, 즉 스스로 대중의 눈밖에 있기를 바랐던 편집자들의 자기규정 탓이다. 근대란 계약을 통해서 움직이는 사회이고, 서명된 이름을 통해서만 온전히 자신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책공장 베네치아』와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인 ‘편집자’를 전면으로 호출한다. 물론 두 책의 층위는 다르다. 『책공장 베네치아』는 사학자의 저술답게 자료를 조직해서 베네치아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서적과 출판의 역사를 엄밀히 재구성하는 데 치중한 반면,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편집..
책에 대하여(롤랑 바르트) 문득 바르트 책을 꺼내 아무 곳이나 펼쳐 읽다가 마주친 한 구절. 밑줄이 선명하다. 언제, 그어둔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욕망만은 선연하다. 나는 읽기를 통해 인생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읽는 자로서의 인생. 그게 다였다. 정말 이게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책은 의미를 창조하고, 의미는 인생을 창조한다.”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아래는 오래전 장석주 선생이 쓴 『일상의 인문학』(민음사, 2012)에서 밑줄 친 구절들인데, 모두 바르트의 것이다. 함께 여기에 옮겨 둔다. “그의 텍스트로부터 와서 우리 생 속에 들어가는 저자는 통일된 단위가 없다. 그는 간단히 복수적인 ‘매력들’이며, 몇몇 가냘픈 세부사항의 장소이고, 그럼에도 싱싱한 소설적 광휘의 근원이며, 다정함..
출판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어제 한국출판연구소가 주최한 제69회 출판 포럼에서 발표한 글이다. 발표 후 참석자 간 자유 토론이 있다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토론은 없었다. 김종수 소장님의 반론 아닌 반론(!)이 있었을 뿐. 나의 관심사는 콘텐츠 비즈니스로서 출판이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를 징후적으로 읽어 보려는 것이었다. 현재 출판계에서 시도 중인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출판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출판의 기초 콘텐츠 전략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저자를 발굴하고 책을 잘 만들어서 독자와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기본 콘텐츠 전략을 바탕으로 최근 출판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실천들을 징후적으로 읽어 보려는 마음에서 쓴 것이다. 앞으로 출..
지금, 출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기획회의》 기고) 《기획회의》 356호에 여는 글을 썼다. 이번 호 특집은 2013년 출판계 키워드 50으로 올해를 돌이켜보고 내년을 전망하자는 것이다. 해마다 11월 마지막 호는 이 특집으로 꾸려진다. 여는 글 역시 이에 걸맞았으면 했는데, 쓰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조금 우울한 어조가 나와 버렸다. 아마 글을 쓸 때 감기로 몸이 아팠던 탓일 터이다. 어쨌든 아래에 옮겨서 기록해 둔다. 어려운 시절(Hard Times)!산업 자본주의가 확산되던 시절, 고난에 빠진 영국 노동계급의 처참한 삶을 보여주려고 찰스 디킨스는 자기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오늘날 한국출판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누군가 같은 이름표를 붙이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말과 글’의 비즈니스답게 해마다 출판은 수많은 화제들을 쏟아내는데, ..
‘편집자’는 어디에 있는가 - 사상사 연구에서의 편집자의 위치 편집자는 지식 또는 사상의 구조에서 잊힌 좌표로 표시된다. 그것은 근대 출판에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 즉 사상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이자 주체의 결단, 스스로 대중의 눈밖에 있기를 바랐던 직업적 편집자들의 사명 탓이다. 최근 사상사 속에서 이 잊힌 좌표를 복원하려는 논문을 한 편 읽었다. 일본 세카쿠인대학 교수로 있는 후카이 도모야키(深井智朗)의 논문 「20세기 신학 사상과 무대 뒤의 편집자들」이다. 이 논문은 사상사의 전개 속에서 편집자들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편집자가 사상의 발전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 구절 몇 부분을 소개해 읽고 난 감동을 대신한다. 지금까지의 사상사 연구는 ‘저자로서의 사상가’, 혹은 그 저자에 의해서 집필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