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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편집자’는 어디에 있는가 - 사상사 연구에서의 편집자의 위치



편집자는 지식 또는 사상의 구조에서 잊힌 좌표로 표시된다. 그것은 근대 출판에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 즉 사상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이자 주체의 결단, 스스로 대중의 눈밖에 있기를 바랐던 직업적 편집자들의 사명 탓이다. 최근 사상사 속에서 이 잊힌 좌표를 복원하려는 논문을 한 편 읽었다. 일본 세카쿠인대학 교수로 있는 후카이 도모야키(深井智朗)의 논문 「20세기 신학 사상과 무대 뒤의 편집자들」이다. 이 논문은 사상사의 전개 속에서 편집자들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편집자가 사상의 발전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 구절 몇 부분을 소개해 읽고 난 감동을 대신한다.



지금까지의 사상사 연구는 ‘저자로서의 사상가’, 혹은 그 저자에 의해서 집필되고 표현된 텍스트를 ‘독자’ 혹은 ‘연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틀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즉 ‘저자―독자’의 관계라는 틀이다. 그것은 저자에게만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인 권위가 자명하게 부여되었던 시대의 틀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대학이나 아카데미라고 하는 제도가 그러한 초기의 권위를 잃고 상대화되었고, 그러한 제도적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 대학 밖에서의 ‘학(學)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결국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대학인(大學人)이나 학회원(學會員)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더욱 폭을 넓혀 대중에게 사상의 시장이 확대되어 갔고, 한발 더 나아가 그 시장이 사상의 가치를 직접 판단할 수 있게 되어 갔다. 이처럼 사상이 일부 지적 서클의 독점물에서 해방되었을 때, ‘저자―독자’라는 공고한 틀은 깨어지게 되었고 양자 사이에 새로운 지식의 프로모터로서 ‘편집자’가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저명한 권위를 대신하여 시장이 필요로 하는 사상을 공급하기 위해 등장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경영이나 기술로서의 인쇄라고 하는 기존의 제한된 가능성을 탈피하고 극복해, 사상 그 자체의 내용과도 직접 관계 맺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을 통하여 사상사 연구에서도  ‘저자―독자’라는 단순한 관계적 틀을 넘어  ‘저자―편집자독자’라고 하는 새로운 틀을 등장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시대 정신이 명확한 형태[像]로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때, 그 표현을 담당한 출판계에 변화가 보인다. 지식인의 운동을 파고 들어가 보면 반드시 출판인의 움직임과 맞닥뜨리게 된다. 출판은 새로운 지(知)의 탄생에 배후자의 역할을 담당하여 보이지 않는 음영(陰影) 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知)의 창조를 조직해 나가는 모습을 지닌다. 따라서 사상이 움직이는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출판의 생태적(生態的) 관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원래부터 출판이란 것이 창조적인 일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에야마 야스토시)


편집자는 사상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편집자 스스로가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간골프 휴빈거)


고도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어떤 훌륭한 예술이나 사상도, 그것이 읽히거나 들리거나 보일 수 있는 구조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근대의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는 사상도 종교도 모두가 출판사와 편집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결국 출판사나 편집자가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산실(모태)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그라프는 이러한 새로운 관계의 전개 과정을 의식하여, 종교의 경우에는 ‘출판사 종교(Verlagsreligion)’라는 말까지 사용한 바 있다.


작가에게 시간을 주어라. 이것이 우리의 첫째 계명이다. 우리는 작가의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전체 문학 형상물로서의 작가를 소개한다. (주어캄프의 출판 정신)


그들[편집자와 출판사]은 출판이라고 하는 도구(tool)를 이용하여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나 지배적 문화에 도전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사상가에게 (수동적으로) 협력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생각을 언어화(言語化)해 줄 수 있는 사상가(집필자)를 찾아내어, 그들을 통해 발언을 하고자 하였다.


사상사 연구에서 편집자의 위치나 의미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현대와 같이 ‘사상의 상품화’가 운명처럼 되어 버린 사회에서는 편집자나 출판사가 사상가나 저자와 대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장과도 대치하도록 해야 한다. ...... 20세기 초두에 일어난 ‘편집자의 사상’ 또는 ‘사상으로서의 편집자’에 대한 발견은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사상사 연구에서 큰 울림을 주었지만, 21세기 이후의 사상사 연구에서는 한층 진일보하여 “누가 편집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저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