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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를 추구합니다 (청주 강강술래)


잠든 거인은 저절로 깨어나지 않는다. 낡은 램프는 내버려두면 낡은 램프일 뿐이다. 알라딘이 낡은 옷소매로 문질러 광을 낸 후에야 거인이 풀려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책은 사람 앞에 놓인 램프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눈을 옮기지 않으면, 안에 잠든 거인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도서관은 각종 마법 램프들의 전시장이다. 000번 총류에서 900번 역사에 이르기까지 램프들이 잘 분류된 채로 소원을 들어주려고 알라딘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램프에 거인을 잠들게 만든 마법사들은 어떨까. 가끔이라도 램프를 문질러 소원을 빌고는 있는 걸까.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는 법은 드물고, 교사가 자식 가르치는 건 어려운 일처럼 이들 역시 자신을 위한 램프 닦기를 힘겨워할까. 책의 프로페셔널, 즉 저자, 편집자, 평론가, 디자이너, 서점직원, 출판기자, 사서 등 책으로 밥을 버는 이들은 책을 어떻게 읽을까.


충북 청주시 학교도서관 사서들의 독서동아리 ‘강강술래’ 회원들이 독서모임이 끝난 후 도서관 서가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책의 프로페셔널들이 책 읽는 법

편집자는 책을 읽지 않는다. 다만 책을 만들 뿐이다. 출판계의 우스갯소리다. 사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 다만 책 정보를 읽을 뿐이다. 도서관계의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그 웃음은 분명히 쓴웃음일 것이다. 

그래서 청주시립정보도서관 가는 길은 마음이 명랑했다. 기대로 부푼 심장이 힘차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매달 한 차례씩, 이곳에서 청주지역 학교도서관 사서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는다. ‘강강술래’의 모임 장소인 도서관 3층에 도착하니, 이미 토론에 불이 붙었다. 이번 달 도서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그리고 산이 울렸다』(현대문학). 삶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척박한 대지 아프가니스탄,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된 파리, 거대한 풍요의 땅 미국 등을 배경으로 가족의 참된 의미를 물어보는 작품이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 해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서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잣집에 딸을 파는 아버지 심정은 이해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져 있다. 곧바로 반론이 이어졌다.

“선생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삶을 현실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대로 살아가면 절대 빈곤 탓에 삶의 가장 소중한 것조차 모조리 잃어버리는 더 큰 불행이 닥쳐올 겁니다. 책에 나오는 말처럼, 손을 살리려면 손가락을 잘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도서관은 가장 오래된 미디어다. 정보를 모아들이고 배치하고 발신하는 지식발전소이며, 그 과정에서 지식의 정수만을 가려 뽑아 보존하는 문화보관소다. 작가 옆에 편집자가 있듯이, 사서는 독자 곁에서 인류의 농축된 지혜를 위에서 아래로, 앞에서 뒤로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서 “사서의 머릿속에 무한한 책들을 소개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라고 말했다. 독서모임은 사서의 머릿속에 책을 진짜로 입력하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이다. 김희종 선생이 말머리를 풀었다.

“책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수업 자료로 필요한 책을 읽을 뿐 정작 제 삶을 위한 책을 읽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사서인 우리가 책 읽는 기쁨을 알아야 책을 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책 읽는 기쁨도 되찾고, 평소라면 읽지 않을 다양한 책도 접하려고 모임을 제안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같이 읽을 만한 책을 고민한다

청주는 책의 도시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를 찍어낸 흥덕사(興德寺)가 있던 곳이며, 그 터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해 조상들의 찬란했던 인쇄문화를 되살리려 애쓰는 곳이다. ‘책 읽는 청주’를 내걸고 매년 두 권씩 책을 선정해 청주시민이 모두 함께 책을 읽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덕분에 각종 독서 동아리들이 시 전체에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다.

사서들이 모여 책을 읽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응이 적어서 일일이 연락해서 모임을 같이하자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가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모임의 순수한 취지를 알고 스무 명 정도가 기꺼이 첫 모임에 나왔고, 벌써 네 해 동안 크게 들고남 없이 매달 회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으로 성장했다. 김희종 선생은 이해인의 시 「책을 읽는 기쁨」을 예로 들어서 같이 책 읽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준비해 둔 ‘감동 카드’를 손에 쥐어준 기분이다. 사서답다. 엉겁결에 좋은 선물을 받은 것만 같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감사하라.// 책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 구절로/ 내 삶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질 수 있음을/ 늘 새롭게 기대하며 살자.”

같이 읽기는 책이 주는 기대와 풍요를 부풀린다. 스무 명이 모여 책을 이야기하면 책을 스무 번 읽는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이 말할 때마다 행간에 감추어져 있던 삶의 의미들이 다채롭게 변신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때때로 눈부시고, 때때로 불편하다. 하지만 책은 ‘취향의 미디어’인 만큼, 같이 읽기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다. 임명희 선생이 이야기했다.

“사서들은 남의 말을 듣는 데 익숙합니다. 도서관에 있다 보면 온갖 말들이 들려옵니다. 때때로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데 왜 갖다놓지 않느냐, 저 책이 있는 걸 보면 안목이 의심된다느니……. 처음에는 분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달관했습니다. 사람마다 책을 보는 눈이 아주 다르고, 사서란 공동체 전체가 같이 읽을 만한 책을 고민하니까요.”

프로페셔널답게 모임 진행이 아주 매끄러웠다. 소리가 높아진다 싶으면 어느새 늦추고, 개별 감상으로 흐른다 싶으면 슬쩍 찌르기가 들어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분위기를 파악해 스스로 토론의 온도를 조절하는 듯했다. 이옥수 선생이 말했다.

“매달 발제자가 따로 있습니다. 발제자는 의견수렴 과정 등을 거쳐 이야깃거리를 마련한 후 발제문을 작성합니다. 발제 성격에 따라 토론이 달라집니다. 책 읽은 감상을 주로 물을 때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발표하고, 찬반 의견이 필요할 때는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서 토론합니다. 토론을 통해서 책 속에 숨은 다양한 관점을 끌어내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려고 애씁니다.”

다양성은 사서의 영혼이다.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타인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훈련이다. 도서관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조장하는 목소리만은 배제된다. 삶을 전체로 바라보고 통찰할 수 있는 인문학 소양은 사서의 단단한 디딤돌이다. “인문학의 바탕이 없는 독서는 삶의 가치가 아니라 수단이 될 뿐”이다. 


충북 옥천의 정지용문학관 앞 정자에서 정지용 시를 읽는 강강술래 회원들. 옥천 문학기행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사서가 변하면 공동체가 변한다

지금까지 모임에서 가장 호응이 좋았던 책은 이현수의 『나흘』(문학동네)이었다. 한국현대사의 치명적 상처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그 의미를 두고 토론이 아주 치열했다. 김금희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책 읽는 청주’의 선정도서였어요. 이곳 청주에서 멀지 않은 충북 영동에서 일어났기에 더욱 와 닿았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전후세대라 이 사건을 잘 몰랐습니다. 구한말 내시 가문에서 시작해 동학과 6.25라는 역사적 격동 속에서 운명으로 닥쳐오는 현실에 힘껏 대처해 가는 사람들 모습이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노근리의 매미는 지금도 내 속에 머물러 있고, 세월이 흘러도 좀체 소리가 작아지는 법이 없다. 때때로 장기를 갉아먹고는 저희끼리 뱃속에서 시끄럽게 울다가 한꺼번에 날개를 펴고 후드득거리며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울림 큰 구절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성 짙은 작품만 읽는 것은 아니다. 모임에서 읽는 책은 질서가 없는 쪽에 차라리 가까웠다. 학생과 함께 읽을 것을 고려해서인지 소설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그때그때 발제자가 떠올리는 대로 제안해 같이 읽는 쪽이다. 연유용 선생이 말했다.

“아이들을 보면, 추리소설만 읽는 학생, 만화만 읽는 학생, 고전이나 추천도서만 고집하는 학생이 있어요. 다양한 책을 못 접한 탓이죠. 사서로서 모임에서는 다양한 책을 읽으려고 애씁니다. 혼자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책도 많습니다. 그런 책도 읽고 같이 토론하다 보면 나름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모임은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특정 시기에, 어떤 공간에서 사람들을 겪어 가면서 살았다. 따라서 책이 탄생했던 자리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있다. 저자가 겪었을 햇빛, 바람, 안개 등을 같은 자리에서 체험하면 절로 마음에 쌓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곧 책의 씨앗들이다. 어쩌면 저자란 그 씨앗을 품어 길러 마침내 꽃피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같이 읽다 보면 모여서 책이 탄생한 자리로 달려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김은실 선생의 목소리가 아련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모임은 옥천 문학기행입니다. 옥천성당, 부소담악,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문학관 옆 정자에서 돌아가면서 정지용 시를 읽었던 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밤이 이슥해졌다. 도서관 직원이 퇴실을 재촉했다. 사서의 변화는 단지 개인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사서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로 곧장 이어진다. 거인이 잠든 램프처럼 책에는 읽는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순옥 선생이 말했다.

“사과 속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 사과는 셀 수 없습니다. 우리 책모임이 가족 독서, 사제 독서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씨앗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씨앗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강강술래가 추천하는 같이 읽으면 더 맛있는 책

모임을 꾸려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먼저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1)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어떤 책을 누가, 언제,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책읽기의 맛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파도타기를 잘하면 재미있지만 잘못하면 공포와 두려움만 생기듯이, 책읽기 역시 잘하면 삶이 풍요로워지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과 사회에 독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특유의 책읽기 방법과 그 울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우리 안에 꽁꽁 얼어버린 사고의 틀을 깨고 삶을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씨앗으로 책을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박웅현,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1).

강예린·이치훈, 『도서관 산책자』(반비, 2013).

박범신, 『소금』(한겨레출판, 2013). 

이현수, 『나흘』(문학동네, 2013).

백희성, 『보이지 않는 집』(레드우드, 2015).

바바라 오코너,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신선해 옮김, 다산북스, 2014).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산이 울렸다』(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