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디자인

(7)
출판은 영원한 벤처야(박맹호 회장 추모사) 《한국일보》에 박맹호 회장님 추모사를 실었습니다. 부음을 듣고 홀로 망연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그룹인 민음사의 출판원리입니다. 아마도 회장님께서 이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새벽에 부음을 듣고, 가슴속 등불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물다섯 살에 어린 나이로 박맹호 회장을 만나 스무 해 넘도록 곁에서 책을 배우고, 편집자의 길을 익히고, 출판의 세상을 경험했다.말년 휴가를 나와 면접에 간 날이 마치 어제 같다.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첫마디는 대뜸 “언제 출근할 거냐?”였다. 엉겁결에 제대 다음 주라고 해버렸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눈빛의 형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대답이 내 운명..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 미시마 구니히로의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미시마 구니히로,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편집자의 생명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데이터 또는 경험, 또 하나는 영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데이터는 조사로 만들 수 있고, 경험은 일해서 축적할 수 있지만, 영감이 바닥을 치면 끝이라는 것이다. 소진과 고갈의 허탈과 지루를 견뎌낼 만큼의 뻔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루하루를 무의미와 멍 때림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의미의 집적체인 책이 쏟아내는 아우라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미시마샤의 사장 미시마 구니히로도 그랬다. “‘뭘 위해서’ 하는지 잘 모르겠는 일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소화해 내는 와중에, 감각이 마비”되어 “생각해야..
너무도 성급하게 가로짜기로 바꾸었다(심우진) 아쉽게도 오늘날의 책에서는, 전통과 수학적 규범에 바탕을 둔 납활자 조판의 엄격함도, 기계적 고효율에 바탕을 둔 사진 식자의 자유분방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민숭민숭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디지털과 관련한 정체성 혼란은 이전 시대를 훑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왜’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우진, 「20세기 본문 조판 유람기(1)」, 《기획회의》 415호, 2016년 5월 20일, 64쪽) 《기획회의》가 올 때마다 가장 꾸준히, 열심히 읽는 글은 심우진의 연재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이다. 그런데 이번 호에 실린 글은 특별히 흥미로웠다. 요즘 본문 편집의 비성찰적 장식성에 대한 불만을 적잖이 품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디지털과 관련..
책 표지가 거절되는 수많은 이유에 대하여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에릭 카테가 표지 디자인 작업 과정에 대해 짤막한 글을 썼습니다. 표지 디자인이 거절되는 이유를 나열하고,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숙고한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책 표지가 거절되는 수많은 이유에 대하여 에릭 카테(Erik Carte) 나는 프리랜서 표지 디자이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소수의 출판사를 위해 책 몇 권을 디자인해서 수입을 보충해 왔다. 잦은 야근이나 불법 소프트웨어, 우울한 수입은 일단 젖혀두고, 아마도 독립한 북 디자이너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디자인한 표지가 거절되는 수많은 이유들일 것이다. 여기에 내 표지 디자인이 거절당한 이유를 적어둔 짧은 목록이 있다. · 너무 상업적이다· 충분히 상업적이지 않다· 남자들한테 팔리지 않을..
북 디자인에 대하여 우리는 장소를 설계하는 것처럼 페이지를 설계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그 일은 높은 책임감을 요구하는데, 페이지 위에 텍스트를 잘못 놓아두는 것은 곧 저자의 생각을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학적 느낌을 생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 종이에 어떤 요소들을 늘어놓고 인쇄할 때에는, 아무리 사소한 텍스트라 할지라도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 한다. 책 한 권을 설계하는 일은, 아니 심지어 한 페이지라도 설계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작업이다.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먼드 기드 이 구절은 오래전에 슈타이들 전시회에 갔을 때 벽에 적힌 것을 메모해 둔 것이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바깥 창문이 얼어붙었다. 이러한 장인성을 잃고 나면 출판이란, 책이란 도대체 무엇이..
거대한 여백 - 디자인에 대한 몽상(《디자인》 2012년 7월호) 이 글은 작년 7월에 월간 《디자인》에 실었던 글이다. 게재 직후에 원고 파일을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사라졌는데, 북디자인과 관련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문득 발견했다. 과거에 쓴 글이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다. 여기에 옮겨 둔다. 거대한 여백 디자인에 대해서 쓰려 하니 가장 먼저 거대한 여백이 떠오른다. 순전한 흰색, 어떤 문자도 문양도 그 위에 그려질 수 없는 절대 공간. 한창 산을 좋아했을 때, 새벽에 텐트 문을 열고 나오면 첫 빛으로 자태를 드러내면서 망막을 하얗게 태우고 언어의 길을 단숨에 끊어버렸던 눈 내린 직후의 흰색 산야. 어느 한밤중 문득 자다 일어나 꿈속에서 썼던 아름다운 시를 끼적여보려고 대학 노트를 여는 순간, 형광등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을 뿜어내 머릿속의 리셋 ..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민음사, 2012) 보드리야르의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가 나왔다. 작은 책이지만 쉽지 않은 내용과 디자인 때문에 편집하는 후배와 디자인하는 후배 둘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 내용과 디자인이 어우러지는 좋은 책을 만들어 냈다. 사라짐에 대하여 미디어와 가상 현실, 네트워크의 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현실성 살해에 대해 지겹도록 떠들었다. 반면 현실이 언제부터 존재했느나는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실제 세상이 근대에 이르러, 그 세상을 변형하고자 하는 결심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략) 인간이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준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실제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