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책 읽기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 미시마 구니히로의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 미시마 구니히로,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편집자의 생명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데이터 또는 경험, 또 하나는 영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데이터는 조사로 만들 수 있고, 경험은 일해서 축적할 수 있지만, 영감이 바닥을 치면 끝이라는 것이다. 소진과 고갈의 허탈과 지루를 견뎌낼 만큼의 뻔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루하루를 무의미와 멍 때림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의미의 집적체인 책이 쏟아내는 아우라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미시마샤의 사장 미시마 구니히로도 그랬다. 

“‘뭘 위해서’ 하는지 잘 모르겠는 일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소화해 내는 와중에, 감각이 마비”되어 “생각해야 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고 생각보다 행동이 최우선시되는 곳에서 의미도 없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을 지냈다. 하긴 이런 인생이 몇 달씩 계속되다 보면 차라리 증발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일한 행운이 나한테 있었다. 그사이 미시마가 겪었던 것과 같은 순간도 물론 있었다. 책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듯한 느낌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나 자신이 싫을 때가 있었고, 아무리 글자를 들여다봐도 생각이 전혀 마름질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적이면 홀린 듯 몇 책을 꺼내서 읽고 또 읽곤 했다. 일본의 출판 평론가 나카오카 요시유키가 쓴 『출판 프로젝트 X를 찾아서』(김성민 옮김, 열린책들, 2006)도 그중 하나다. 원제가 ‘출판을 둘러싼 모험’인 이 책은 보수적인 일본 출판계에서 출판 모델을 혁신하려 했던 중견 출판사 여섯과 소형 출판사 일곱 등 모두 열세 군데 출판사의 모험을 기록한 책이다. 어려운 출판 현실을 헤쳐 가려고 온힘을 다하는 이 출판사들의 기기묘묘한 시도를 읽다 보면, 뇌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어느새 다시 출판을 할 결심이 섰던 것이다.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갈라파고스, 2016)의 ‘미시마샤’를 처음 안 것도 이 책에서다. 편집자 출신의 사장 미시마 쿠니히로가 이끄는 이 작은 출판사는 어려운 출판 환경을 아랑곳하지 않는 씩씩한 활동이 인상 깊었다. 『분투기』의 번역자가 한 말처럼, “미시마샤는 책 분야에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특이한 출판사”로 인터뷰만 읽어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특이한 회사였다. 

출판사의 힘은 반드시 규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책을 고르는 좋은 감식안이나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디자인 능력에서도, 서점이나 도서관과의 깊은 관계에서도, 독자를 감동시키는 기발한 마케팅 활동에서도 출판사의 힘은 발휘된다. 활력 넘치는 미시마샤의 움직임은 자신의 습관적 출판 활동에 신물이 난 편집자에게 기대와 동경의 대상으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조금씩 차오르는 마중물로 다가오곤 했다. 이 책에서도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이의 눈으로 볼 때 회사를 세우고 모든 리스크를 한 몸에 짊어진 채 매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것만으로 눈부시게 보인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출판계의 상식을 파괴하면서 독특하게 움직이는 미시마샤는 정녕 눈부셨다. 때때로 출판의 새로운 미래처럼 보일 정도였다.

『분투기』는 ‘조증’의 활기와 창조로 넘친다. “마비된 감각”에서 깨어나 “출판사를 만들자고 결심한” 사람이 다시 현실에 패배해 ‘코마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록을 아주 즐겁게 펼치고 있다. 괴테는 말했다. “모든 새로운 분야에 들어서면 우리는 일단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출발해야 하고, 문제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미시마의 출판은 어린아이 놀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하고 주변 온도가 지글지글 뜨겁다. 책에 대한 동물적 후각, 즉 ‘야생의 감각’을 믿고, 기획의 무모함을 근성으로 보충하면서 정글 같은 출판의 세계를 그야말로 좌충우돌 누빈다. 

직원들 감각에 와서 닿는 책은 모두 출간하는 ‘작은 종합 출판사’를 지향하고, 규모에 걸맞지 않게 거래비용을 감당하면서 ‘서점과 직거래’하고, 독자들한테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전할 수 있도록 서점의 POP를 모두 손으로 제작하고, 어려운 살림에 도쿄와 교토에 두 군데나 사무실을 운영하고, 출판사 사무실을 한 주일에 한 번 서점으로 만들고, 출판 기획 교실을 열어서 가르치고 그 결과를 책으로 펴내기도 한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력은 창업 초기 결심을 현장에서 그대로 지켜 가려는 미시마의 필사적인 노력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창업을 결심한 미시마가 처음으로 노트에 썼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독자와 곧바로 연결된다.’ ‘원점회귀하는 출판사’ ‘편집과 영업은 둘이서 하나, 양 바퀴가 기능적으로 연동하는 것. 스피드를 내도록 하라. 작은 회전을 잘 살리자.’ 이리하여 이후 미시마샤의 활동 틀이 만들어졌다.


미시마샤의 출판은 ‘독자와 함께’라고 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쓴 듯한데, 의외로 날카롭다. 감각이 좋다는 말이다. 원고를 줄 만한 좋은 필자를 대형 출판사에서 이미 독점한 상황에서, 자본도 변변치 않은 미시마샤가 갈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시장 규모가 어정쩡해서 대자본이 매력을 느끼지 않는 틈새시장을 차분히 공략해 가는 것. 하지만 미시마는 대담하게도 그 방향이 아니라 ‘독자’ 쪽을 직접 공략한다. ‘편집과 영업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회사, 즉 ‘독자와 곧바로 연결’되는 출판사를 설계하고 이를 실무에서 선명하게 구현하려 한 것이다. 책에 대한 열정이 밀어올린 뜨거운 아이디어가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서 식어빠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한테 전달되는 출판사, 즉 독자의 반응을 먹고 사는 출판사를 구상한 것이다. 


내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덧셈을 풀고 실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있는 책을 만들어, 독자에게 확실히 전달하고 싶다.’ ‘활동 하나하나가 미래의 출판을 쌓는 한 걸음이었으면 한다.’


흔히 생각할 때 출판사에 쌓이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저자들. 둘째, 도서 목록. 셋째, 브랜드. 그러나 ‘책의 발견’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의 출판 환경에서 출판사가 가장 공들여 쌓아야 하는 것은 ‘독자’일 것이다. 독자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는 “활동 하나하나가 미래의 출판을 쌓는 한 걸음”이 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미시마샤가 자신의 활동을 세 가지 동사, 즉 ‘만들다’ ‘보내다’ ‘닿다’로 압축하고, “독자의 눈에 들기 위한 움직임”에 커다란 정성을 기울인 것은 미시마샤의 창업 시기를 생각할 때 예지력 넘치는 전략이다. 어쩌면 일본에서는 이미 ‘발견’이라는 이슈가 당시에도 심각했는지 모른다. 하기야 연간 8만 종이나 책이 쏟아지는 출판대국에서 책을 출간해서 독자들 눈에 들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독자-서점직원-저자-출판사, 이 넷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이 ‘연결’을 느끼게 되었을 때, 언제나 꼬마전구가 팟 하고 켜진 것처럼 기분이 따스해진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 가는 구절이다. 저자에서 독자까지 하나의 직선을 긋고, 그 선이 끊이지 않도록 한 권 한 권에 공을 들여서 기분이 따스해지는 ‘연결’을 이룩해 가는 것, 이것이 미시마샤의 출판이다. 그러려면 “한 권의 힘”을 믿고, 거기에 “최대한 높은 ‘열량’을 담아” 책을 만들고, “그 열량을 최대한 보존해 독자에게 보내는” 일을 기꺼이 해야 한다. 미시마샤가 도매를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하고, 서점에 진열할 POP를 직접 제작해서 보내고, 독자의 엽서에 일일이 손으로 답장을 쓰고, 매일 온라인 매거진에 글을 올리고 이를 손 글씨 잡지로 만들어 발송하는 것은, 소출판사로서는 독자와 연결을 이루는 다른 길이 별로 없다고 믿기 때문인 듯하다.


‘어떻게 해야 팔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독자가 기뻐할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회사를 돌아가게 하려고 ‘파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만드는 것의 원점에서는 멀어진다. 만드는 것의 원점은 어디까지나 ‘기쁨’을 교환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독자가 기뻐할까”를 질문하는 철저한 독자 중심주의가 결국 미시마샤의 경쟁력이고, 한국의 출판사가 이 책에서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질문일 것이다. 또한 이 소박한 질문이야말로 한 책을 팔아서 다음 책 만들 비용을 조달하는 소출판사가 기적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힘일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출판사가 어찌어찌 유지하면서 확실히 살아가는 것은 매일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것.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라면, 반드시.


보라. 이 터무니없는 믿음이 일으킨 기적의 높이를. 느끼라. 바다 건너에까지 뜨겁게 전해진 열기를. 『분투기』는 출판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최상의 체험적 안내서가, 습관적 출판에 영감을 잃고 기진맥진한 이들에게는 처음의 열의를 돌려주는 촉매가 될 것이다. 출판 현장의 동지들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