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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민음사, 2012)


보드리야르의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가 나왔다. 작은 책이지만 쉽지 않은 내용과 디자인 때문에 편집하는 후배와 디자인하는 후배 둘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 내용과 디자인이 어우러지는 좋은 책을 만들어 냈다. 


사라짐에 대하여


미디어와 가상 현실, 네트워크의 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현실성 살해에 대해 지겹도록 떠들었다. 반면 현실이 언제부터 존재했느나는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실제 세상이 근대에 이르러, 그 세상을 변형하고자 하는 결심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략) 인간이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준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실제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15쪽)


계급투쟁은 마르크스가 명명한 순간부터 존재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명명되기 직전에, 가장 치열하게 존재한다. 명명되고 나면, 필히 기울기 시작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학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는 순간이다. (중략) 하나의 사물은 그 개념이 나타나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17쪽) 


기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결정적이 구분선을 긋고, 결국에는 인간에 반대하는 끝없는 가능성들을 전개하고, 조만간 인간의 사라짐을 초래할 것이다. (21쪽)


인류는 진화를 인위적으로 가속하여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어떤 죽음 충동이나 미분화된 원시 형태를 지향하는 퇴행적 기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모든 힘과 역량을 최대로 표출하고자 하는, 급기야 죽음을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그런 충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23쪽)


―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민음사, 2012)



『사라짐에 대하여』는 이런 충격적인 문장들로 시작한다. 육체적인 죽음을 앞둔, 그러니까 자신의 사라짐을 염두에 둔, 그러면서 현실과 가상, 사물과 개념,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로 가득한 소품이다. 보드리야르의 사진론이자 현실론이며 예술론이다. 난해하고 배배 꼬인 문장을 교열하면서 디자이너와 협력해 전체 시스템을 간결하게 정리해 낸 편집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짧지만 정말 멋진 책이다.


타이포그래피에 통찰력이 있는 북디자이너 유지원이 전체를 마름질한 이 책은 제목이 표현하는 탄생과 소멸과 재생을 염두에 둔 듯 아슬아슬한 물질성을 실현하고 있다. 왼쪽 페이지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코드 숫자들은 미디어, 가상 현실, 네트워크를 끝없이 상기시키면서, 오른쪽 페이지에서 견고하게 진행되는 쇠 같은 보드리아르의 목소리와 어우러지면서 협주한다. 일부러 모조지가 아니라 서적지를 써서 막 태어난 듯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오래 존재해 사라져 버릴 듯한 느낌을 강화했다. 몇 달에 걸쳐서 이런저런 시안들을 검토한 끝에 후배와 함께 선택한 디자인이다. 마음에 아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