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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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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변화하는가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생활을 바꾸어 주겠다고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기세등등하다. 주변에서도 온통 누가 더 잘 할까 이야기로 시끄럽다. 대선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 중 정말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드문 듯하다. 청년 도스토옙스키는 야심만만했다. 스물네 살 때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라는 칭송을 들으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자신감 넘쳤던 청년은 곧이어 유럽 전역에 몰아닥친 혁명의 물결에 뛰어들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그룹에 참여해 차르 체제를 비판하고 농노 해방을 꿈꾸다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극적 효과를 노린 차르의 정치 쇼에 불과했으나 영문도 모른 채 처형장에 섰던 도스토옙스키는 닥쳐온 죽음의 공포 속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마지..
도스토옙스키와 민중의 발견 우리 민족의 가장 숭고하고 단호한 성격의 특징은 정의감과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건 없건 수탉처럼 달려드는 습성, 이런 결점은 그들에게 없다. 표면에 뒤집어쓰고 있는 껍질을 벗겨 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신중하게 그 알맹이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민중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자도 민중에게는 가르칠 것이 많지 않다. 단언하건대, 오히려 반대로 현자들 자신이 민중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 죽을 위기를 넘어서서, 또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베리아 감옥 생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민중의 진실이다. 고통 어린 ..
격정의 언어로 쓴 대한민국 철학사 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는 뜨거운 글이다. 일종의 격문 형태로 쓰여진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승려의 철학인 고려의 철학, 양반의 철학이었던 조선의 철학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뜻을 품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답하는 현재의 주체는 민중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의 주체로 “고난과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민중이다. 스스로를 철학 노동자로 칭하는 저자는 이 책으로써 민중들에게 먹일 ‘뜻’ 있는 철학을 생산하려 한다. 유대칠에 따르면, 한국 철학은 ‘나’를 ‘희망의 시작’으로 놓는 철학이다. “민중의 철학은 ‘나’로부터 시작해 스스로 ‘나’로 돌아오는” 주체의 철학이면서 이 “‘나’가 ‘홀로 있음’의 ‘나’가 아니라 ‘더불어 있음’의 ..
“지배적 시선에서 벗어나 다르게 살아보라”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 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존 버거 자신의 말 그대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김현우 옮김, 열화당, 2017)에 담긴 글들은 아주 짧다. 정신의 높이와 넓이는 여전히 충분하지만, 육체가 오랜 긴장을 더 이상 축적하지 못하는 말년의 글이다. 존 버거의 글들은 소박한 언어로 자유를 향한 정치적 격렬함을 표출하고, 간결한 어조로 땅에 일구며 살아온 인류의 지혜를 온축할 줄 알았다. 그 경지가 한층 깊어진 것일까. 이 에세이들은 행들과 밑줄이 나란한 기적을 연출한다. 어쩌면 지난 1월 2일, 사망 소식을 접한 후이고, 이 책이 마지막 에세이집으로,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안타..
‘문장의 관료화’라는 말을 배우다 _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윤여일 옮김, 돌베개, 2017)를 읽다 비평가의 글은 자기가 속한 시대를 분석하고 그에 적절한 실천의 도구를 제시하면 그만이지만, 그 행위를 통해 후세의 사람들에게 생각의 도구를 제공하면 금상첨화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윤여일 옮김, 돌베개, 2017)를 읽다가, ‘문장의 관료화’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벌써 몇 주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장이 아주 예리하게 베인 느낌이다. 나 자신이 썼던 많은 글이 머릿속에 줄지어 떠오르면서 일종의 자괴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무의미한 글이 세상에는 없지 않다. 가령, 관료의 글이 그렇다. 학자가 써내는 글도 태반이 그렇다. 문학자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상태가 현재 일본에서 특히 눈에 밟힌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장의 관료화라는 현상을 인정해야지 싶다. (1..
[문화일보 서평]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 _이은봉의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이은봉,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이하 『책 이야기』)라는 제목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정곡에 정곡을 더한 ‘퍼펙트 골드’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제목에 적힌 이 어마어마한 ‘책’은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적어도 15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는 얼마만큼은 이 책과 함께 부침을 같이했다고 할 수도 있다. 『책 이야기』에서 다루는 대상은 이른바 『삼국지』다. ‘이른바’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책 이야기』에 나오는 『삼국지』가,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는 『삼국지..
노벨문학상, 다시 문학의 본질을 물을 때(서울신문 칼럼)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탐사보도 전문기자다. 사람들이 ‘문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알렉시예비치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주요 작품은 모두 분류상으로는 산문(논픽션)의 영역에 속한다.알렉시예비치의 작품들은 전쟁이나 재난 같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깊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민중들의 목소리를 복원했다.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휩쓸렸던 시민 수천 명을 일일이 인터뷰한 기록을 바탕으로 그 사건의 실체를 보여 줌으로써 공식 기록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적 진실을 폭로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시대의 ..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15일(수) 절각획선(切角劃線)은 책장의 귀를 접고 밑줄을 긋다는 뜻으로 리쩌허우가 쓴 글 제목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는 책의 핵심을 파악하려면 직접 몸을 움직여 체험하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읽기의 금언으로 삼아 매일의 기록을 남긴다. 그러고 보면 옛 선인들은 매일 읽은 것을 옮겨 적고, 나중에 이를 모아서 편집하여 하나의 책을 만듦으로써 읽기에 대한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그로써 새로운 지혜를 축적하고 표명했다. 이 기록이 언젠가 그 끝자락에라도 닿기를 바라면서. (1)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 중에서 ― 여자들만이 사랑할 줄 안답니다. 남자들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156쪽)― 육체를 가진 두 존재가 최초로 서약한 곳은 부서지는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