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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문장의 관료화’라는 말을 배우다 _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윤여일 옮김, 돌베개, 2017)를 읽다


비평가의 글은 자기가 속한 시대를 분석하고 그에 적절한 실천의 도구를 제시하면 그만이지만, 그 행위를 통해 후세의 사람들에게 생각의 도구를 제공하면 금상첨화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윤여일 옮김, 돌베개, 2017)를 읽다가, ‘문장의 관료화’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벌써 몇 주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장이 아주 예리하게 베인 느낌이다. 나 자신이 썼던 많은 글이 머릿속에 줄지어 떠오르면서 일종의 자괴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무의미한 글이 세상에는 없지 않다. 가령, 관료의 글이 그렇다. 학자가 써내는 글도 태반이 그렇다. 문학자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상태가 현재 일본에서 특히 눈에 밟힌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장의 관료화라는 현상을 인정해야지 싶다. (13쪽)


여기에서 다케우치가 말하는 ‘문장의 관료화’란, 사태를 ‘단정적으로’ 진단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글만 가지고서는 그 ‘사람들’이 진짜 누구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글에서 ‘사람들’이라고 쓰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 속에만 있는 사람들이어서, 실제 현실에서는 그들을 도무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글은 “글의 성립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 즉 “글이 아닌 것”이다. 관료화된 문장을 구사하면 생기는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관료는 관료라서 악이라기보다는 민중을 관료화하기에 최대의 악이다. (14쪽)


‘문장의 관료화 현상’은 우매한 민중을 계몽해서 이끌어야 한다는 ‘지도자 의식’에서 나온다. “지도자 의식은 아무래도 가치를 거짓으로 꾸며내기 마련이니 현실이 이중이 된다. 있는 민중과 있어야 할 민중을 나눈다.”(15쪽) 문장의 관료화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책에서 본 현실이나 외국에서 본 현실이나 머릿속에서 그려낸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것, 관념을 현실에 덮어씌우고 자신의 ‘지도’를 받아 현실이 계몽되기를 어리석게 기도하는 것이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민중은 바보라서 도조에게 속았고, 내버려 두면 또 속을 테니 ‘정말이지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과연 민중은 도조에게 속을 만큼 바보였다. 그러나 속은 덕분에, 도조를 대신한 ‘민주주의’ 지도자를 함부로 믿지 않을 만큼은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또 속는 게 아닌지 의심할 만큼 영리해졌다.(23쪽) 


‘관료화된 문장’을 구사하면서 ‘지도자 의식’을 풀풀 드러내는 이들은 현실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머릿속에 이상적인 ‘본래’의 민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호령 한마디에 민중은 본래의 면목을 되찾고, 자신이 이끄는 길에 올라타리라는 헛된 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가혹하다. 다케우치가 평생토록 연구한 루쉰은 민중이 절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소리 없는 중국’ 속에서, 그 처절한 침묵의 세계 속에서 ‘외침의 언어’를 고를 줄 알았다. 따라서 “루쉰의 진보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매개로”(18쪽) 한다. 


천황의 군대에서는 병사가 죽기 전 “만세”를 외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애국주의자의 선전이라고 치부했지만 군대를 겪고 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만세”라 외치는 것 말고는 병사에게 대체 어떤 말이 가능할까. 병사에게 그 외침은 힘을 다한 저항이며, 그만큼이 그의 자유다. (24~25쪽)


이것이 현실이다. “죽어가는 병사가 ‘전쟁 반대’나 ‘천황제 타도’가 아니라 ‘만세’를 외”치는 현실 말이다. 여기서 절박한 자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비평은 뒤집힌 관료주의를 퍼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향」에서 루쉰은 절망의 언어를 끈질기게 기록해 감으로써 희망의 언어를 발굴하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루쉰을 좇아서 현실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문장, “그림자가 없는 관념”의 언어로 쓰인 관료화된 문장은 ‘진짜 현실’로부터 비평가를 격리함으로써 ‘지도자’를 만들어낼 뿐이다. 절망을 경험하지 못한 이런 문장은 아무리 많이 써 봐야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될 뿐이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루쉰은 “지배자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상관없이, 민중은 거기에 호오를 갖는다는 무서움을 깨닫지 못한 비평가와 자신을 구분”(26쪽)했다고 한다. 다케우치는 이야기한다.


사상은 생활로부터 나와 생활을 넘어선 곳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성립한다. 그렇다면 생활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 생활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모두 사상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는 생활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싹트지 않은 사상과 아직 생활에 매개되지 않은, 따라서 생산성을 갖지 않은 외래의, 따옴표 친 사상이 있을 따름이다. (35쪽)


이 문장이 쓰인 지 벌써 60년이 넘었는데도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지금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지도록 강요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