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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한국사회의 ‘감정 사전’을 비판적으로 다시 쓰다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김신식,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을 읽다. 이 에세이는 ‘심정’을 다루고 있다. 김경자・한규석의 논의를 빌려서 저자는 심정을 “상대방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 활성화된 속마음”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심정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 마음에 신경 쓰도록 하는 감정의 특정한 작용이다.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 마음에 더 신경을 쓸까? 사회 내 위계가 사람의 감정을 불공평하게 표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회가 감정을 처리하는 특정한 규칙을 다루는 일이고, 동시에 감정을 권력의 작동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사용함으로써 한 사회 내부에 층층이 쌓여 있는 위계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 책이 “한국사회의 감정 문화에 대한 비평”이면서 한국사회의 권력에 대한 비판이 되는 이유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감정의 형태는 모두 55가지다. 때로는 ‘우월하다, 다행이다, 아쉽다, 싫다’ 같은 형용사 형태를, 때로는 ‘웃다, 따지다, 추구하다, 드러내다’ 같은 동사 형태를 취한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경험의 흔적들이다. 이 말들 앞에는 가끔 ‘아무튼, 어이없어, 아직’ 등의 부사어가 붙어 있는데, 이 한정사는 특히 청년 세대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 말들은 감정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고 관계에 따라, 세대에 따라, 역사에 따라 달라진다는 저자의 주장을 그 자체로 증명하는 것 같다. 

저자의 감정 분석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저자의 일상 고백, 타자에 대한 관찰, 감정 사회학 일반 이론 등이다. 한 꼭지당 대여섯 쪽 정도의 짤막한 글들은 ‘분석적인 통찰’과 ‘성찰적인 솔직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단단한 이론을 통해 감정을 사유하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이론을 구축하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저자는 한국사회 전반에서 작동 중인 감정의 정치경제를 파헤쳐 나간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산다』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아픈 이는 명랑의 강제적 회복을 요구받는다”고 말한다. “애초에 밝은 인간”이라는 캐릭터를 강요당하고, “타인이 기대하는 감정 이미지에 아픈 이가 맞춰 주어야 하는 ‘부합의 노동’”에 시달린다. 설령 당신이 “정체 모를 상태에 허덕이고 싶”더라도 사람들은 “당신의 일상을 관람”하다 “너무 어두워” 또는 “너무 밝지 않아?” 등의 말로 당신의 삶에 개입한다. “명도의 은유”로 당신의 삶과 감정을 재단하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수시로 개입한다. 그러나 타자의 느낌을 존중하기보다 자기가 바라는 느낌을 타자 안에서 확인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특정 명도를 표준으로 강요하는 감정의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분석을 중첩해 가면서 저자는 한국사회의 ‘감정 사전’을 비판적으로 다시 쓴다. 이 책에 따르면, ‘정정하다’는 “젊음의 시선에서 불편하지 않고 젊은이 눈요기에도 좋은 노인의 건강”을 말한다. 이 말에는 “‘그리 쾌활하게 사셔야 젊은 친구들에게 그나마 대접받고 산다’는 질타가 교묘히 깔려 있다.” 내부 고발자를 향해 ‘용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해고의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이는 “내부 고발이 촉발하려는 공적 화두를 대단한 개인의 윤리로 가두는 셈”이며, “내부 고발자를 좀처럼 보기 힘든 순수한 윤리를 지녔다는 진공 상태에 놓”이도록 만든다. ‘아쉽다’는 “사람들 신경질”의 일종으로, “전반적 평가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평가에 지친 사람들”이 “평가 시에 받은 억울하고 눅눅한 마음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의 감정 교환에 깃들어 있는 낡은 규칙을 예민하게 분석한 후, 이에 바탕을 두고 감정의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애쓴다. “감정은 선명히 가 닿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주의에 닿지 않은 채 삶을 이루는 미지의 생각”이다. 감정에 대한 우리의 앎이 충분하지 않다면, 함부로 타인의 감정을 안다고 하지도, 이 감정을 저렇게 느끼라고 하지도 못한다.

책을 읽는 내내, 한국사회 전체에서 감정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가는 동시에 나 자신의 말과 글,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분석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과정은 기쁘지 않고 슬펐고, 떳떳하지 않고 부끄러웠다. 감정의 사회학은 우리를 “구경꾼으로 두기를 거부한다.” 이 책을 손에 들면 누구나 “‘뭘 그 정도 갖고 그래요’라고 속삭이는 또 다른 나”와 싸울 수밖에 없다. 이는 새로운 지성의 구축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지성이다. 당신의 마음을 모조리 찍지 않은 채 당신이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감정을 보호할 지성이다.” 


#readingbook2020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