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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걷기에서 희망을 읽다

로제 폴 드루아의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


집 앞, 당현천 산책길에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루한 방바닥 구르기와 답답한 마스크 생활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나와 물 따라 난 길을 천천히 걷는다. 따스한 봄볕이 마음을 부추기고, 상쾌한 바람이 생기를 가져오며, 살짝 벌어진 꽃들이 기쁨을 일으킨다. 우연히 마주친 이웃과 가볍게 안부를 나누고 반가운 대화를 즐기기도 한다. 우정과 사랑이 곳곳에서 피어난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의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에 따르면, “모든 이동이 기계화・동력화된” 현대 사회에서 걷기는 “산으로, 숲으로, 들판으로, 바닷가로” 떠나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걷기’는 “인간의 기본적 몸짓, 세상에 존재하는 본래적 방식”이다. 

“오래 걸을수록 걷기는 우리를 사로잡고 점령하며, 우리의 몸짓과 호흡 리듬, 심장 박동을 바꾼다. 걷기는 생각에 연이은 변화와 새로운 자극을 가져오고, 생각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인류는 걸으면서 뇌를 키웠고, 생각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말과 생각이 걷기를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걷기가 넘어질 듯하면서도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은 침묵에 빠질 듯하면서도 애써 단어를 이어 붙이며 계속되고, 생각은 비판에 무너질 듯하면서도 이성의 힘으로 자신을 회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다면 생각의 선수인 철학자는 언어의 고수이자 산책의 전문가는 아닐까.  

이 책은 엠페도클레스와 프로타고라스에서 니체와 비트겐슈타인까지, 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노자와 공자까지 스물일곱 철학자들의 걸음걸이에서 그 사유의 정수를 발굴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철학을 해서 ‘소요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걷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철학은 걷기의 일종이었다. 플라톤은 ‘우상의 동굴’을 걸어 나와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는 아무리 뚜렷해 보여도 진리가 아니다. 잘 사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눈물이 철철 흐르는 안구의 고통을 이기고 진리의 빛을 향해 걷는 일이다.

천하를 편력했던 공자는 “목표도 이동도 없는” 걷기, 즉 인(仁)을 사람됨의 중심에 놓았다. 하늘의 운행처럼 부동의 질서는 있다. 하지만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인한 사람은 하늘의 질서가 사람 간에도 작동할 수 있도록 “매 순간 형편에 맞게” 지속적 조정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손발 둘 곳 없이 복잡한 예법을 제정하는 부산한 걷기가 아니라 북두성처럼 멈추어 있어도 뭇별들이 따르는 가만한 걷기여야 한다. 덕이라는 독특한 걷는 방법 말이다.

플라톤의 후손답게 데카르트 역시 “참과 거짓의 구분법을 터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건강이 별로였던 이 회의주의자는 달리지 않고 걸어서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걷는 법 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말한다. “언제나 바른길을 따른다면 아주 천천히 걷더라도 길을 벗어나 달리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다.” 철학자는 무지의 숲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한 방향으로 중단 없이 걷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인간은 “발로 생각하는 존재”다.

걷기는 “인간 존재 방식의 척도 자체”다. 걷지 않으면 인간의 인간됨도 있을 수 없다. 걸을 때 비로소 우리 감각은 세계를 제대로 감지한다. “길가에 핀 꽃 향기를 맡고 돌의 질감을 느끼며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풍경과 한 몸을 이루면서 비로소 자신을 세계 속으로 돌려놓는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두 발 동물의 지구력 안”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한다.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움직이면 살고 멈추면 죽는다. 이 본능에 이끌려 우리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제 생명 됨을 증명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걷고 있다. 인사하면서 말의 길을 트고 대화하면서 생각을 깨운다. 우애가 번창하는 인간다운 삶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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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칼럼입니다. 조금 고쳐서 여기에 옮겨둡니다. 

#readingbook202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