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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기자 헤밍웨이는 어떻게 글을 썼을까



기자 헤밍웨이는 어떻게 글을 썼을까

― 사실을 말하기,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기



“전쟁은 작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노년의 대가 헤밍웨이가 말한다. 확실히 그럴 만하다. 전쟁과 같은 끔찍한 경험은 작가에게 인생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 당신이 작게라도 매혹을 느꼈다면, 덧붙은 한마디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는 전쟁을 깊이 증오합니다.”

청년 헤밍웨이가 기자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작가가 된 이후에도 때때로 종군 기자의 임무를 즐겼음은 잘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고,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들어 반파시스트 전선에 섰다는 것은 ‘극한의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신화를 이룬다.

헤밍웨이가 기자로 쓴 글이 ‘하드보일드’라는 고유한 문체의 기초가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사건 현장에서, 때로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가 작성한 기사를 읽은 기억은 전혀 없다. 팬으로서 헤밍웨이 작품의 뿌리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대부분의 기자들이 육하원칙을 좇아서 사실만 기록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탓이다.

『더 저널리스트』(김영진 옮김, 한빛비즈, 2017)는 헤밍웨이가 기자 시절에 쓴 여러 글들을 세심하게 엮었다. 몇 주 전 책이 나왔을 때 훑어 읽었던 이 책을 오늘 새벽에 일어나 정독했다. 헤밍웨이의 팬이라면,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거, 소설이잖아.’ 기자 특유의 객관적 시선을 전혀 잃지 않은 채, 헤밍웨이는 정교하게 선택된 사실들의 숨 가쁜 묘사만으로도 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든다. 아니, 진실이란 사실들에 대한 생생하고 정확한 기술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잘 알려준다.

“최고급이라도 전선을 바라보고 있는 쪽의 방은 하루 1달러면 되었다. 포탄이 날아오는 방향 반대편의 작은 방은 훨씬 비쌌다. 호텔 정문 인도에 포탄이 떨어진 후에는 원래 묵던 방의 두 배 정도 되는 스위트룸에서 채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묵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죽은 것은 내가 아니다. 누군가는 죽임을 당했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 언론을 통해 지루하게 이어지는 ‘급박한 위기’는 사람들의 짜증을 부추겨 평화를 향한 갈망을 잊게 하고, 전쟁을 통한 담판을 선호하도록 만든다. 전쟁광들은 오직 이 문장을 부적으로 삼을 뿐이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단 발발하면, 단 한 사람도 참혹의 굴레를, 더러운 멍에를,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개죽음”의 운명을 벗어던질 수 없다. 헤밍웨이는 말한다.

“머리에 총을 맞으면 빠르고 깔끔하게, 어찌 보면 아름답게 죽음을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시야에 내려앉은 흰 섬광만 빼고 말이다. 총알이 전두엽이나 시신경을 휘젓고 지나가면 섬광마저도 없을 거다. 날아온 총알이 당신의 턱 주변만 날려버리거나 코나 광대뼈를 뭉개버리면 당신은 머리로는 생각할 수 있겠으나 목소리를 낼 얼굴이 없을 거다. 머리 대신 가슴팍에 총을 맞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거고, 아랫배에 총을 맞으면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마다 장기가 쏟아져 아득하게 정신을 잃는 느낌이 들 것이다. (중략) 각반 아래로 허옇게 튀어나온 뼈를 보게 되거나 곤죽이 된 당신 발이 부츠에 그대로 박혀 있는데 전우들이 그걸 벗겨낼 때, 아니면 팔이 잘려나가며 뼈가 갈리는 게 어떤 느낌일지 알게 될 때, 아니면 몸이 불에 타거나 숨이 막히고 토악질이 멈추지 않을 때, 각가지 방법으로 살이 잘려나갈 때…… 여기에서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나 의미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참혹함, 이 끔찍함, 그리고 인간이 고깃덩어리로 전락해 버리는 듯한 이 모멸감……. 이것은 ‘나의 전쟁’이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는 자들은, 책상 앞에 이 문장을 적어놓고 먼저 백 번쯤 읽어야 한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전쟁’을 ‘머리로 떠올리고 몸으로 겪는 개인의 전쟁’으로 만들어준다. 총알에 맞고 포탄의 열기에 살이 타고 사지가 녹아내려 고통을 겪을 자는 우리 자신이다. 

아아,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전쟁광들은 오늘도 여전히 주문을 읊는다. “나는 살 것이다. 죽는 건 내가 아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한마디 더 경고한다. 이 목소리는 얼마나 준엄한 호소인가. 얼마나 엄연한 사실이자 슬픈 진실인가.

“역사상 전쟁의 갖은 잔혹성 때문에 인류가 전쟁을 포기한 적은 없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희생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내가 장담하건대, 당신이 죽을 차례가 온다.”

『더 저널리스트』는 헤밍웨이가 쓴 기사 사백여 편 중 스물다섯 편을 선별해서 실었다. 단편소설처럼 읽히는 섬세하고 정교한 사실 기록에 날카롭고 신랄한 풍자와 감정을 일절 배제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권력의 힘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문장의 힘으로 그에 맞서려 하는 이 문장을 보라.

“파시스트 독재자께서 어느 날 언론사 취재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기자들이 모두 모였다. (중략) 무솔리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은 그 유명한 찌푸린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중략) 마음속에는 이미 200명의 특파원이 써내려 갈 수천 가지의 신문 헤드라인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검은 셔츠의 지도자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강렬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등등. 나는 까치발로 무솔리니의 등 뒤로 걸어가 그가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 뭔지 확인해 봤다. 그건 위아래가 뒤집힌 프랑스어-영어 사전이었다.”

작가 정신과 기자 정신은 하나다. 다른 것을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드러내려는 용기 말이다. 헤밍웨이는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의 고민은 변하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이 변할지언정 고민은 언제나 같습니다. 작가의 변치 않는 고민거리는 어떻게 진실만을 말할까, 무엇이 진실인지 깨달은 후에 이것을 어떻게 글에 녹여내어 독자의 삶 일부가 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