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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백민석의 아바나 여행기



당신은 볼거리가 많은 나라에서 왔다. 아바나에서 보내는 일상이 벌써부터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볼거리가 많다는 것은 당신이 소파에 앉아 줄곧 텔레비전과 휴대전화만 들여다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볼거리가 없다는 말은 당신 스스로 볼거리를 찾아 나서고, 스스로 볼거리를 창출하고, 스스로 볼거리가 되기 위해 엉덩이를 떼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바나의 시민들이 거실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고, 플로리다 해협을 등지고 앉아 트럼펫을 불고, 광장에 이천 명씩 모여 살사 댄스를 주고, 프라도 거리에서 시민 노래 경연을 벌이듯이.


글은 이인칭으로 쓰여 있다. 소설도 아니고 쿠바 아바나에 대한 여행기인데, 웬 이인칭? 여행을 다녀와 사진을 고르는 민석과, 사진을 고른 후 자신한테 중얼거리는 민석이 떠오른다. 메모 또한 조금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바나를 몇 구역으로 나눈 후, 마치 화투 패를 뜨듯, 무작정 사진을 골라서 생각나는 대로 썼기에백민석의 『아바나의 시민들』(작가정신, 2017)에는 미로를 탐험하면서 자기 자신한테 속삭이는 어조가 넘쳐난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가이드북 없이 다녔다. 그래서 당신은 늘 길을 잃었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미지의 것들과 부닥쳤다. 가이드북 없는 여행의 좋은 점은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은 뜻밖의 장소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그게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은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지만”이다. 주문이자 다짐과 같다. 작가란 본래 타자의 서사에 따라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서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 본분을 잃지 않고, 민석은 아바나 곳곳을 안내자 없이, 호기심 닿고 발길 움직이는 대로, 수차례 길을 잃어가면서 소년처럼 걷고 있다. 덕분에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 시선에 포획된다. 


어느 한 정체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그/그녀는 사랑을 잃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아바나가 정확히 아토포스였다. 


그래서 이 여행기는 가이드북에도 없고, 저자 자신도 반복 불가능한, 하나의 예술작품 같은 독특성을 갖게 되었다. 쿠바에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에겐 별다른 쓸모가 없지만, 페소아의 리스본같이, 카잔차키스의 스페인같이, 헤밍웨이의 파리같이, 아바나를 작품으로 즐기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독창적인 체험을 기꺼이 선사한다. 백민석이 읽어낸 고유한 텍스트로서의 아바나. 


아바나에서 끝없이 걷는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아바나에 대한 독서 행위나 마찬가지다. 낱말을 읽듯 집집마다 기웃거리고, 행간을 읽듯 골목마다 헤집고 다니고, 문단을 읽듯 지역을 훑는다. 나중엔 책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듯 아바나 전체를 알게 되거나, 알게 되었다고 자신을 속이게 된다.


민석은 사진이라는 기계 눈에 자주 방점을 찍는다. “사진은 휘발될 추억에 물성을 부여해, 한정된 형태로나마 현실을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한다. 당신은 그들을 남은 생애만큼 당신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그러나 사실 나는 이 책에서 사진을 거의 보지 않는다. 소설가의 문장은 얼마나 쓸 만한 것인가. 차라리 나는 읽고 떠올리는 쪽을 택한다. 민석의 문장은 간결하고 정확하며, 선명하고 날카롭다. 거를 것과 잡을 것을 구분해서 포착하고,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면서 사유를 집약하는 것은 문장의 곡예를 오랫동안 벌여본 사람이 아니면 잘할 수 없다. 


말레콘은 중독성이 있다. 아바나에 짐을 푼 지 이틀 만에 당신은 중독된다. (중략) 하지만 중독은 스펙터클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쉴 새 없이 와 부서지고 포말을 날리는 파도들 때문도 아니다. 당신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보면서, 실은 당신 자신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실존에 끊임없이 그러지는, 그러면서도 금세 스러지곤 하는 주름을 보는 것이다. 상념, 행복했던 한때이든, 불행했던 한때이든, 또 미래의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불안까지 드리워진 상념에서 당신은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 말레콘에서 당신은 상념에, 당신 자신에 중독된다. (중략)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이 주는 옅은, 희박한 고통을 놓고 싶지 않다. 삶의 고통은 아직 참을 만하고, 심지어 적당히 즐길 만하다.


아바나의 해변에 있는 거대한 방파제. 민석은 거의 매일 말레콘으로 간다. 가서 여러 군상의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파도다. “거대한 파도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방파제를 때리는 모습”을 본다. 때로 파도는 힘을 내뻗어 도로 건너편까지 침습한다. 때때로 민석도 파도에 젖는다. 하지만 진짜로 젖는 것은 마음이다. 민석은 말한다.


말레콘의 파도는 방파제를 때려 부숴버릴 만큼 힘이 세다. 그 힘은, 방파제뿐 아니라 그것을 보는 여행자의 마음까지도 부숴버린다. 그래서 아바나를 찾은 여행객은, 자신의 부서진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이곳을 찾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와 대화하는 자다. 자기를 만나려고 그는 풍경을 통해, 타자를 거쳐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 민석은 어쩐지 고독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낯선 언어에 둘러싸인 자의 외로운 호기심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현지의 타자와 시선을 공유하려는 여행자의 기이한 겸손함. 자기로부터 탈출해서 타자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사랑의 언어가 여기에 있다.


당신은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저 사람이 보고 있는 곳, 저 사람의 눈길이 가서 박힌 곳. 당신은 다른 사람의 눈길이 가리키는 곳에 종종 흥미를 느낀다. 거기엔 왕왕, 당신의 눈이 스스로는 찾아내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월 하순이다. 시각은 다섯 시 가까이, 갑자기 골목이 부산하다. 습관적으로 민석은 카메라를 들고, 현지인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다. 거기, 골목을 가득 메운 빛이 있다. 별로 특이할 게 없는 평소의 풍경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모두 그 빛에, 또는 그 빛이 지칭하는 무엇에 홀려 있다. 그 “신비 체험”에서 민석은 소외되고 이를 악문다. “이 세계엔 현지인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오직 현지인의 눈에만 허용된, 당신이 아무리 기계 눈을 부릅떠도 결코 잡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어쩌면 이 책은 그 절망을 넘어서 끝내 이 무언가를 포착하고 싶었던 마음의 결과일지 모른다. 그 시도는 성공했을까. 민석은 말한다. 


쓰고 나서는 오히려 충만한 감정을 가졌다. 믿기지 않게도 내 안에서 무언가 샘솟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우울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모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무언가 내 안에서 생산된 느낌이었다. 작가가 되고 나서 처음 경험한 신기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