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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부러움에 지치면서 읽은 책 ― 김혜형의 『자연에서 읽다』(낮은산, 2017)


부러움에 지치면서 읽은 책

김혜형의 자연에서 읽다(낮은산, 2017)



하루 종일 논물 위에 엎드려 피를 뽑으며 생각했어요. 밥이 내 입으로 들어올 때 이젠 이 모든 것들이 오버랩 될 거야, 하고요. 갓 발아한 볍씨, 연둣빛 모판, 발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논흙의 감촉, 흙때 낀 손톱, 끊어질 듯한 허리,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 논둑을 걷는 아이들의 물그림자……. 체감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들은 쉽게 망각되지 않습니다. (중략) 머릿속으로 아는 것의 뿌리는 참 얕아서, 알았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일 수 있겠구나 싶어요. 내가 보는 세상의 피상성, 상투화가 은폐하는 삶의 세부, ‘안다’는 생각이 일으키는 착시와 결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부러움에 지치면서 읽는 책이 있다. 김혜형의 『자연에서 읽다』(낮은산, 2017). 주말에 시골 마을에 가지고 내려와 그늘을 옮기면서 빠져들어 읽었다. 고즈넉한 외딴 집에서 먼 곳의 벗이 보내는 편지를 읽는 기분이다. 삶은 담백한데 사유는 웅숭깊고, 말은 풍요로운데 뜻은 소박하다. 여름 독서로 정녕 제격인 책이다. 

지붕으로 새끼고양이가 주인 몰래 뛰고, 마당에는 흰 개가 길게 하품을 한다. 나비가 어울려 날면서 여러 겹 허공에 노란 선을 긋고, 바람이 불 때마다 감나무를 감고 오른 칡덩굴이 점점이 보라색 꽃을 떨어뜨린다. 이런 곳에서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내가 쓰고 싶은 책을 남이 미리 써 버린 것 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힐 까닭도 없었으리라.

끝없이 달리는 가지와 오이와 호박과 토마토, 끈질기게 번져 가는 어성초, 하늘에 삿대질하듯 자라는 칠성초, 작고 사랑스러운 토종 오이……. 주말마다 이곳에 내려와 얻은 작은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 책에 나오는 한 단어, 한 줄이 이토록 자주 마음의 줄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식물의 한살이가 응축된 이 작은 열매들은 이제 배고픈 겨울새들의 몸을 거쳐 어딘가로 이동할 거예요. 다음 생을 결정하는 모든 기억과 정보를 탑재한 작은 우주선이지요. 생애 절정의 순간을 한 점에 가두어 다음 생으로 전할 수 있다니, 생명살이의 핵심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글쓴이와는 같은 편집자로 작은 인연이 있다. 그가 산골에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안빈(安貧)하기로 한 것은 예전에 들었다. 이 책은 그 삶에 여러 해 농사로 다져진 몸이 들어서고 계절을 순례하며 나무와 꽃과 풀과 새의 언어를 가리는 힘을 얻은 네 계절의 기록이다. 제목 ‘자연에서 읽다’는 복합적인데, 이 책은 독후감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기록이며, 또 자연의 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세부를 살피고 기뻐하는 감각은 우리들 편집자의 천성이고, 꾸준하게 글을 읽고 깃들인 사유에 민감한 감각이야 우리들 편집자의 본분이다. 그러나 문장의 힘은 삶에서 확인받을 때 비로소 거대해짐을 이 책을 읽고서 더 공감하게 되었다. 글쓴이는 말한다.


정밀하고 적확한 언어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밀도 있는 경험치가 내재되었을 때 ‘공감’이라는 사건 혹은 정서적 도약이 일어납니다. 그 경험이 바야흐로 ‘나의 언어’로 말해지려면 대상에 대한 시선과 정서가 깊은 데까지 이르러야 가능할 테고요.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자연에 둘러싸인 질박한 삶이 책의 언어를 붙잡아 단련하는 훈련장 같다. 당대의 인문편집자는 시골살이를 하면서 자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변주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편집자가 된 것도 같다. 언어의 농사를 짓던 사람이 먹거리 농사를 통해서 경험을 얻어 사유의 농사꾼으로 성숙하고, 그 힘을 도약판 삼아서 글의 무늬를 익혀 가는 느낌이 글마다 담뿍 배어 있다.


민들레도 냉이도 쑥도 개망초도 각자의 삶을 자기답게 살아가요. 키 작은 민들레가 키 큰 접시꽃을 부러워하지 않듯,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성에 집중할 때 삶은 꽃처럼 피어납니다. 다른 꽃과 비교해 초라한 꽃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풀들처럼 꽃들처럼, 나도 주어진 한 목숨 제몫을 다해 살 뿐이에요.


이제 우리말은 더 이상 헬렌 니어링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체통에 둥지를 튼 박새 한 쌍의 이야기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담아낸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우리가 좋아할 만한 산문가가 또 한 사람 세상으로 나섰다.


태풍의 밤을 무사히 넘긴 후 한동안 우체통에선 ‘삐익삐익―’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새들 소리가 요란했어요. 박새 부부는 먹잇감을 물고 부지런히 들락거렸습니다. 둥우리에서 나올 땐 새끼들의 하얀 똥을 부리에 물고서 잠깐 문턱에 앉아 주위를 경계하다 휘릭 날아가고요. 둥지 튼 지 한 달 남짓 지났을까요. 밭의 풀을 뽑다가, 요즘 우체통에서 새소리가 안 나던 게 문득 생각나서 가보았어요. (중략) 조심스레 열어 보니 텅텅 비었네요. (중략) 이끼와 마른 풀과 짐승의 털로 이루어진 푹신하고 오목한 둥지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중략) 

둥지는 떠나기 위해 있는 것, 그곳이 일시적 거처라는 건 새들이 가장 잘 압니다. 둥지가 아까워서 못 떠나는 새는 없어요. 새들은 머뭇거리거나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올 때 나 역시 머뭇거리거나 뒤돌아보지 않았어요. (중략) 한때는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애착의 거처였으나 결국 떠남으로써만 의미가 완성되는 그것. 그러므로 제 몫을 다한 후 소멸하는 것은 둥지의 운명입니다. 필멸 위에 생성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