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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 _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중국도서전에 갔을 때 가져가서 읽었던 책입니다. 아주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 조금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오후에 잠깐 짬을 내서 느낌을 옮겨 보았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대면하고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 청년 의사의 마지막 나날이 아름다운 문체로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6)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함께 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게다가 그 책이 아름다운 문장과 단단한 인식이 어우러져 읽는 즐거움마저 더한다면 바랄 나위 없다. 일상의 덧없음이 세월을 좀먹는 날들 속에서 하루하루 허우적거리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6)와 마주쳤다. 

슬픔은 서른여덟에 암으로 세상을 잃은 저자의 삶이 환기하는 근원적 비극성으로부터 온다. 의사로서 자신이 수많은 환자를 위해 수술하고 치료하던 암이, 그것도 오랜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막 세상으로 날개를 펴려고 하는 순간에 저자를 찾아온다. 이러한 죽음의 가혹한 필연성은 언젠가 반드시 같은 일을 겪을 인간으로서 자기 삶의 어쩔 수 없는 비극을 숙고하도록 한다.

기쁨은 생의 닥쳐온 비극 속에서도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한 탐구를 끝내 놓지 않은,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했던” 저자의 이년 여에 걸친 용기로부터 솟아오른다. 문학의 길을 접고 의학의 길을 택할 때, 칼라니티가 직면하려 했던 질문이 일상의 분주함과 광포함 속에서도 전혀 스러지지 않은 채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면서 하나의 실로서 그의 삶과 죽음을 바느질한다. 약속 없이 찾아온 죽음에 전혀 지지 않은 채, 칼라니티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다해서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문학은 이제 접어야 했다.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절묘한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심지어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하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64쪽) 


언어의 집으로 세운 간접적 경험을 숙고하는 문학적 명상 대신에, 삶과 죽음이 물리적으로 교차하는 의학적 실천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신경세포, 소화관, 심장 박동의 언어”로부터 “열정, 갈망, 사랑 등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언어”(64쪽)로 나아가려 했던 이 어린 신경외과의는 절망적으로 찾아오는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끝끝내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인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어차피 시한부 인생이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즉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본래적 불안 속을 살아간다. 지금 건강하든 병들어 있든, 우리는 저자와 똑같은 조건에서, 실제로는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죽음과 정직하게 대면하기보다 이를 갖가지 방법으로 외면하려 하는 탓에, 죽음이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혼란에 빠지거나 발버둥을 더할 뿐 삶에 대한 진짜 질문과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이는 삶의 의미를 이야기(문학)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물질에 대한 탐구로 대체하려 했던 근대적 기획의 나쁜 귀결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와 이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쾌락에 대한 중독적 탐닉(데카당)이다. 저자는 결국 자신이 떠난 곳으로, 문학(이야기)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단조로운 황무지에서 방황하던 나는 수많은 과학 연구들, 세포 내 분자 통로, 생존 통계의 끝없는 곡선에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중략) 죽음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어휘를 찾고 싶었다. (중략)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178~179쪽)


정확히 말하면, ‘읽기’였다. 솔제니친, 톨스토이, 네이글, 울프, 카프카, 몽테뉴, 프로스트 등 “죽음에 관한 글”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칼라니티는 무너져 버린 마음과 좌절된 육체를 추슬러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통증 속에서 깨어나서 아침을 먹은 후에 갑자기 “짓누르던 관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179쪽)이 찾아온다. 


‘나는 계속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나는 계속할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할 수 없어. 나는 계속할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179~180쪽)


이 부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어 버렸다.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서용순 옮김, 민음사, 2013)에서 마주친 후 내 인생의 주문으로 삼은 구절이었다. 사는 것이 힘에 부칠 때마다 읊고 나면 얼마나 많은 힘을 주었던가. 최근에 나온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전승화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6)까지 기어이 읽지 않았던가. 폴라티니는 곧바로 말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 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180쪽)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는 “유기체이고 물리 법칙에 복종하는데, 슬프게도 그 법칙에는 엔트로피의 증가도 포함되어 있다.”(94쪽) 이 우주에 사는 한 세포를 이루는 분자가 빠르든 늦든 간에 자리를 이탈하면서 병들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일찍이 석가모니가 깨달았듯이, 생로병사는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모든 필멸이 반드시 허무와 좌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에 집중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더 충만하게, 더 깊이와 높이를 부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은 어쩌면 저녁에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오기에 아침에 도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않고 환자를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 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198쪽)  


의사답게 칼라니티는 자신을 환자로 삼아서 어떻게 해야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자기가 처한 실존적 자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을 더욱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글을 쓰고 아이를 낳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보람을 힘껏 불어넣으면서, 죽음의 바람 속에 삶의 숨결을 언어로써 짜 넣는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257쪽)


아아, 과연 그렇다. 우리는 죽음을 치유하거나 심지어 미룰 수조차 없다. 오직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뿐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우리에게 이 엄연한 사실을 감동적으로 환기한다. 글쓰기와 더불어 저자의 마지막 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 주었던 딸 케이디에게 남긴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더 늦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읽을 책이 또 하나 생겼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