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어느 날, 알랭 드 보통과 말콤 글래드웰, 스티븐 핑크와 매트 리들리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지성계의 프로레슬러들은 ‘인류의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격렬한 태그매치 게임을 벌인다.
지적 거인들 간의 보기 드문 치열한 논쟁을 성사시킨 곳은 캐나다의 오리아 재단이다. 금광 재벌인 피터 멍크가 세운 오리아 재단은 한 해에 두 번 “당대에 가장 뜨거운 국제 현안을 두고 연 2회 세계 정상급 지식인들을 불러서 토론을 벌인다.” 유료 공개 토론회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모임의 이름은 ‘멍크 디베이트’다. 참여자들은 제시된 주제에 대해 사전 투표를 하고, 유명인들의 토론을 듣고 나서 다시 투표해서 심판한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멍크 디베이트의 창설자 피터 멍크는 말한다.
멍크 디베이트는 “지구 온난화, 절대 빈곤, 집단 학살, 불안정한 세계 금융질서” 등과 같은 긴급한 현안을 주로 다루지만, 네 사람이 참여한 날의 주제는 아주 특별했다. “인류의 미래는 나아질 것인가?”라는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연속적으로 충격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들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오는 중인지, 아니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중인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점검해 보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현대를 관통하는 핵심적 가치이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떠받치는 주춧돌이기도 하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러디어드 그리피스가 사회를 맡고, 토론에 불려나온 네 사람은 찬성과 반대로 둘씩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치른다.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는 인류의 삶은 꾸준히 개선되어 왔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이라는 찬성의 입장에 선다. 알랭 드 보통과 말콤 글래드웰은 인간은 결함 있는 존재로 결코 완전한 진보를 확신할 수 없으며,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를 낳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대의 입장에 선다. 『사피엔스의 미래』(전병근 옮김, 모던아카이브, 2016)는 이 두 쌍의 격렬한 토론을 정리한 책이다.
토론의 출발은 스티븐 핑커다. 과학자답게 스티븐 핑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의 운명을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과 수치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좋고 나쁜 일의 발생 빈도를 도표로 그려보는 겁니다. (중략) 그 궤적을 통해 비로소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핑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서 인류의 삶이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10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스티븐 핑커는 이러한 증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후, 비록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보다 꾸준히 대규모 재앙이 줄어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이 격하게 반박에 나선다. 보통은 데이터의 변화와 같은 물리적 증거로는 인류가 진보하는지를 확언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묻는다. 핑커가 제시한 바와 같은 삶의 조건들이 이미 실현되어 있는 스위스와 같은 선진국들조차도 왜 사람들은 불안과 불만에 가득 차 있는가 하고. 따라서 진보를 확신하려고 어리석게 시도하기보다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시인하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쪽이 더 낫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성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진보에 대한 일방적 확신을 경계함으로써,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극도로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입장을 ‘비관적 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사람은 비관적 현실주의를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을 더욱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은 왜 꽃을 사랑하는 걸까요? 인생의 불완전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종이라는 생각에 빠진 나머지 너무 거창한 서사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꽃을 감상하기 위해 멈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 번째로 나선 사람은 매트 리들리다. 과학자답게 리들리는 그래프의 평균값을 내세운다. 개별적 인간의 불행 유무와 상관없이 인류 전체는 꾸준히 더 나은 삶을 향해서 전진해 왔다는 것이다. 리들리는 말한다.
평균적 인간은 매년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행복해지고 똑똑해지고 친절하고 자유롭고 안전하고 평화로워지고, 평등해지고 있습니다.
리들리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엄연한 사실에도 미래에 낙관적이지 못한 것은 ‘생각의 편향’ 탓이다. “개선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로 그날그날 뉴스로 떠들썩하게 알려지지 않”고, “나쁜 소식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이 주목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나쁜 소식”에 편향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편향은 ‘옛날이 좋았지’ 편향이다. “우리는 과거를 떠올릴 때 행복했던 기억들만 걸러내는 반면, 미래에 대해서는 암울한 예측만 추려냅니다. 이상한 형태의 자아도취이지요.” 이는 모든 세대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세대를 ‘전환기’로 보는 “난센스” 탓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생겨난 엄청난 혁신 능력 때문에 미래가 더욱 나아질 수밖에 없다고 리들리는 생각한다.
네 번째 발제자로 나선 말콤 글래드웰은 ‘지금까지는’을 ‘앞으로는’과 맞세운다. 글래드웰은 말한다. “인간 활동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엔진 덕분에 우리는 가뭄과 기근에도 견디는 작물을 개발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기후 변화를 재촉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약간 양다리 비슷해 보이지만, 무작정 낙관적이기만 한 스티븐 핑크와 매트 리들리의 약점을 파고들기에는 상당히 적합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 도입한 지혜가 빚은 반작용으로 인해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나 핵전쟁 등과 같은 재앙들 말이다.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순진합니다. ‘더 낫다’는 단어 자체가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직면할 미래는 과거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미래입니다.
과거의 문제들은 어찌어찌해서 해결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 우리가 직면하는 재앙들은 인간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므로 해결을 낙관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 문제는 인간이 손댈수록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위협의 감축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재구성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미래에 대한 무작정 낙관을 포기한 채, 거침없는 걸음을 멈추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토론은 확연하게 점층된다. 알랭 드 보통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티븐 핑커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행복이란 전적으로 영혼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므로 물질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논의는 곧바로 매트 리들리의 반격을 받는다.
일정 수준의 물적 조건이 밑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행복을 영혼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가난에, 특히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의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 불행하다는 말이리라. 물론, 보통 역시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서양이라서 그런지 그러한 무모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에 글레드웰이 보통의 논리를 덧댄다.
물질적 진보에 대한 열광이 지구 생태계 자체를 파괴한다든지, 인간을 인간 너머의 존재로 변형시키는 단계에 이른다든지 하는 데까지 이른 오늘날의 상황을 성찰해서 조화와 균형을 되찾자는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던 ‘겸손함’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우리에게 닥쳐오리라는 경고다. 하지만 스티븐 핑크는 주관과 객관을 확연하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데 이골이 난 과학자다. 그러한 주관주의에 빠지기보다는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를 두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창의성과 노력을 집중할 것을 주문한다.
토론은 논리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청중을 끌어들이는 적절한 유머와 상대방 속을 뒤집어놓는 적절한 비아냥거림도 어쩌면 필수였다. 특히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풍부한 문학적 교양으로부터 연출된 지혜의 온갖 발언과 함께 말 가로채기, 몰아붙이기, 윽박지르기 등 심통도 제대로 보여주었다. 평소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온화한 철학자 이미지가 싹 날아가 버린 느낌이다.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의 데이터를 내세운 조리 있는 대응도 아주 인상 깊었다. 합리주의의 전형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토론은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토론 전에는 이 질문에 대해 찬성 71%, 반대 29%였는데, 토론 후에는 찬성 73%, 반대 27%로 미세하게 바뀐 것이다.
『사피엔스의 미래』는 일종의 ‘썰전’이다. 이 정도 무거운 주제를 놓고 진지하면서도 활달한 토론을 벌일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기획이 많이 시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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