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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햄릿’ 읽는 농부들 _ 농촌인문학하우스 이야기


매주 홍동밝맑도서관에서 인문학 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시 한 편씩을 읽고, 『햄릿』을 읽고 있습니다. 지난주 《문화일보》 유민환 기자가 다녀갔는데, 기사가 실렸네요. 남은 삶은 이렇게 공부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옮겨 둡니다. 


‘햄릿’ 읽는 농부들 “농촌살이 힘 키우죠”

충남 홍성군 홍동면 ‘농촌 인문학 하우스’ 개설 4개월



스물 청년부터 중년까지 20여 명

생화학·일본어·한자공부 함께

“학습 통해 문제도 스스로 해결”


첫 유기농 농사 생태마을로 유명

마을 찾는 방문객 年 2만 명 달해

FTA 등 세계화속 자립방안 찾아



“우리의 의도와 운명은 정반대로 달리기에/우리가 계획한 것은 끊임없이 뒤집히오./우리 생각은 우리 것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 것이 아니라오.” (‘배우 왕’역을 맡은 학생)

“명문입니다. 최근에는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말할 때 많이 인용되는 문구죠. 외워두셔도 좋을 것 같아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지난 7일 저녁 충남 홍성군 홍동면 밝맑도서관. 2층 ‘작은 모임방’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낭독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4개 벽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갓 스물 넘은 앳된 청년부터 머리 센 중년까지 약 20명의 학생이 둥글게 앉아 있었다. 모두 얼굴이 검게 그을린 이들의 직업은 ‘농부’. 낮 동안 괭이와 호미가 있었던 손에는 어느새 펜과 종이가 들렸다.

이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일상은 지난 4월 시작됐다. 밝맑도서관,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그물코출판사, 생각실천창작소 등 홍성지역 4개 기관이 뭉쳐 ‘농촌 인문학 하우스’를 열면서부터다. 일명 ‘책 읽는 마을 공부하는 농민-인문학 프로젝트’. 철학·문학·예술 등 인간다움을 공부하는 학문인 인문학을 통해 ‘농촌살이’의 나아갈 길을 함께 찾자는 취지였다.

이날은 장 대표가 금요일반으로 개설한 ‘세계문학의 풍경들’이 진행됐다. 함께 ‘햄릿’을 읽은 지 벌써 열세 번째 되는 시간이다. 장 대표는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간, 내면의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나오는 갈등의 힘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수업의 첫 작품으로 택했다”고 했다. 

학생들은 각자 햄릿, 오필리아, 폴로니우스, 배우 왕 등 역할을 맡아 연극하듯 대사를 읊었다. 장 대표는 중요 구절이 끝날 때 짧게 맥락의 의미를 풀었다. 강의보다는 강독에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기초적인 읽는 능력이 생각의 바탕이 된다”며 “문헌을 해석할 수 있어야 스스로 학습하고, 그런 학습을 통해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농촌 인문학 하우스’의 수요일은 김재인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의 ‘철학의 멋진 장면들’, 토요일은 사진작가 민택기의 ‘마을 사진작가 아카데미’가 책임진다. 김 연구원은 “철학사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어려운 문제 상황을 돌파해낸 순간들을 함께 읽고 있다”면서 “비판 정신에 입각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훈련을 통해 ‘노예로 살지 않는 삶’의 방식을 전하려 한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자신도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하다 지난 3월 서울을 떠나 아내와 아이 둘과 함께 마을에 정착했다. 그는 “주민이기 때문에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자유무역협정(FTA) 등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립하는 방안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갓골마을’로 더 잘 알려진 이곳 홍동면은 전국에서 유기농 농사를 처음 시작하고 협동조합 등을 통한 주민자치가 활발히 이뤄지는 생태 마을로 유명하다. 자생적 농촌 경제 모델을 살피기 위해 마을을 찾는 방문객이 연 2만 명에 달한다. 1958년 풀무학교(현 풀무농고)가 세워지면서 관련 실험이 시작됐고, 졸업생들이 마을에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모습을 갖춰나가고 있다. 마을 안에서 기업, 카페, 병원, 농장, 어린이집, 출판사, 헌책방 등이 한데 어우러진다.

‘학습’은 마을의 미래를 이끌어갈 보루이자 삶 자체다. ‘농촌 인문학 하우스’뿐 아니라 유기농 농법을 연구하고 농업 서적을 읽기 위한 생화학, 일본어 등 50여 개의 크고 작은 공부 모임이 마을 이곳저곳에서 열린다. 장 대표가 매주 금요일 오전 여는 한자 교실도 20여 명의 학생이 몰리는 등 반응이 좋다. 풀무농고 전공부(대안대학)를 졸업한 후 마을에 정착한 임이담(여·22) 씨는 집 텃밭(496㎡)과 마을 농장을 일구면서 인문학과 한자 수업에 모두 참여하고 있다. 그는 “공부는 생활의 일부”라며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먼저 찾아보고,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마을의 모토는 ‘생각하는 농부’다. 박완 풀무학원 이사장은 “주민들이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학습체제를 꿈꾼다”며 “특히 미래에 마을의 중심이 될 젊은 일꾼들이 인문학을 통해 생각의 힘을 키우길 바란다”고 했다. 

홍성 = 글·사진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