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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문화산책] 어머니 국수, 아버지 냉면




“음식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

살아감을 생각하게 하는 평양국수


집에서 필자는 이북식 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여름이 되면, 어머니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려 오이냉국을 마련한 후 얼음을 둥둥 띄우고 가는 국수를 몇 덩이 말아 주셨을 뿐이다. 또는 가는 국수에 잘 익은 열무를 올린 후 달걀을 얹고 얼음을 두르고 고추장을 조금 넣어 살살 비벼 주셨을 뿐이다.

매끄러운 국숫발이 한껏 오므린 입술을 조르륵 통과하면서 이에 부딪히면 붉은 혀가 저절로 밀려 나오면서 국수를 휘감아 잽싸게 입 안으로 말아 들인다. 혀끝을 건드리는 매콤한 맛에 뒤이어 국수가 요동치면서 입천장을 두드리고, 국수에 실린 얼음의 찬 기운을 가득 퍼뜨려 머릿속 끝까지 오싹해진다. 이 덕분인지 우리 형제는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큰 사발로 두 그릇은 가벼이 해치우는 국수중독자가 됐다. 바깥 온도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여름이면 그 맛이 못내 그리워진 탓인지 얼음을 장만한 후 어머니를 모셔 와 국수를 삶으라고 안달하곤 한다.

내 기억에 메밀로 빚은 심심한 평양국수를 처음 먹어본 것은 초등학교 때 선친의 일터 근처에서다. 을지로6가에서 일하셨는데, 근처에 평양국수의 전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 밍밍하고 심심한 맛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조용히 앉아서 빈대떡을 오래 씹었을 뿐이다. 질기디질겨 가위를 들고 십자 모양으로 잘라 먹어야 하는 함흥국수는 그보다 훨씬 후인 중학생 때 먹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면이 무척 신기했지만, 먹기 불편하고 맵기만 한 맛에 놀랐다. 게다가 겨자라니. ‘맙소사, 우리 엄마, 국수가 훨씬 낫다’며 속으로 말을 삼키고 부지런히 익힌 고기를 챙겼을 뿐이다. 아버지는 무서웠고 외식은 기뻤으니까.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서울시내에서 약속할 때는 이상하게 충무로나 을지로에서 사람을 만나려 애쓴다. 시간이 남으면 갑자기 지하철을 내려 서성대기도 한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깊이 아버지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소주에 돼지편육을 곁들이다가 마무리로 냉면 한 그릇 때릴밖에. 어머니 국수야 아직 집에서 맛볼 수 있지만, 아버지 냉면은 거기 가야 간신히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음식의 언어’를 쓴 미 스탠퍼드대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는 음식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해준다”고 했다. 먹을거리에서 일어난 변화는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우리를 결정적으로 진화시킨다. 기억의 단층을 형성하고 몸의 나이테를 겹겹이 쌓아 삶의 물줄기를 바꾼다. 변곡점이 주변과 이어지고 지역을 뛰어넘으면 역사의 제방도 쉽게 무너뜨린다. 이 책이 보여주듯이 음식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끈질긴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잠복기가 아무리 길더라도 마침내 시간을 초월해서 되돌아오는,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제왕의 귀환!

우리 문학에서 이를 가장 뚜렷하게 의식한 것은 ‘음식의 시인’ 백석이다. 소래섭의 연구에 따르면, 백석의 시에는 무려 110종의 음식이 등장한다. 메밀국수, 가재미, 무이징게국 등 이름도 다채롭다. 그중 ‘국수’라는 시가 가장 절창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국수는 메밀국수, 즉 평양냉면이다. 시인에게 음식이란 삶의 온전한 온축이다. 국수는 ‘큰마니’가 ‘곰의 잔등’을 타던 신화로부터 내려온 후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四季)를 모조리 거쳐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후에야 눈앞에 놓인다.

그러니 국수를 먹는 뜻이 어찌 생활만을 위한 것일까.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이 결코 홀로 있지만은 않음을, 앞과 뒤와 옆에 누군가 같이 있음을 배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양국수를 앞에 놓고 백석을 생각한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살아감을 생각한다. 재난과 역병의 시대, 이 정도 틈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살 것인가.


★ 세계일보에 쓴 칼럼입니다. 역병에 표절에 온 나라가 정신없는데, 가슴이 답답해진 저는 갑자기 국수가 먹고 싶었습니다. 국수라도 먹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밭에서 막 딴 오이로 냉국을 만들고 국수를 말아 먹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