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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문화산책] 연필을 들고 떠나는 여행


괴테의 생애는 셋으로 나누어진다. 바이마르-이탈리아-바이마르. 연암 박지원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한양-연경-한양. 한 해 반에 걸친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에게 “마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필연성, 즉 운명의 형식으로 제시됐다. 여섯 달에 걸친 연행(燕行)은 박지원에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충격의 연속으로 다가왔다. 

사실 모든 작가는 여행을 통해 극적으로 변신한다. 바이마르 궁정에서 질식해 가던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을 떠났다 돌아오면서 상상력에 물기가 오르고 사유에 품격이 얹히는 극적 전환을 맞이했다. 할 일 없이 세월을 죽이던 중년의 한량 박지원은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북경의 문물을 접한 후 바닥이 하늘로 하늘이 바닥으로 뒤집히는 생각의 격변 속에서 대문장가로 거듭났다.

여행은 왜 떠나는 것일까? 잠시만이라도 지금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다. 왜 다르게 살려는 것일까? 지금 삶으로는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계속하지 못하는 것일까? 일 속에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왜 일에 보람이 없는 것일까? 노동으로는 진정한 나를 이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몸이 잠시 일을 버리고 쉬는 며칠이면서, 마음이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온전함의 시간이다. 여행은 단지 ‘노는 시간’일 수 없다. 생계의 분주함 속에서 잊고 살던 것과 다시 만나는 ‘연결의 시간’이다. 자연과 삶을 연결해 평화를 찾는 시간이고, 내면과 삶을 이어 자아를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연이나 자아와 연결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공허의 틈 속에서 허깨비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 짐승이 되거나 넋이 나가거나 할 수밖에 없다. “제 여행의 중요한 의도는 육체적·도덕적 폐해를 치유하는 것”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여행은 대개가 어느 정도 치유와 탈출의 형태를 취하는 게 당연하다.

많은 여행은 풍물을 즐기면서 몸을 휴식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이 운용해 온 관습적 정보처리 시스템을 갈아엎는 극적 체험을 불러들인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의 지적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 오는 정보의 입력을 거부하는 아집”을 무지(無知)라고 부른다. 낯선 땅, 낯선 문물, 낯선 사람으로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울 기회를 흠뻑 맞이한다. 여행이 무지로부터 지혜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은 분명히 이 덕분일 것이다.

작가들은 여행의 갈피갈피 반짝이는 지혜의 순간들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작은 세부들, 잠시 반짝였다가 곧바로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특이점들에 집착한다. 자세히 살피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깊이 사유하면서 그 순간을 인생으로 이식해 간다.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괴테의 손에는 항상 펜과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고, 북경을 다녀오는 연암의 도포에는 늘 세필과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들은 문장과 함께 여행한다.

연필 대신 카메라를, 노트 대신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 여행은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아니라 수다와 노출의 시간으로 전락했다. 편리는 반드시 어떤 불리를 동반한다. 찍기와 게시는 스트리밍이다. 망각을 아까워하면서 인생의 담벼락에 깊게 새기는 일이지 않고 시간의 흐르는 물결에 슬쩍 표시하는 일이다. 여행에서 느끼는 신선함을 인생으로 끌어오지 않고 오히려 인생을 내보내면서 잠시의 쾌락으로 무화(無化)하는 것에 가깝다.

삶의 순간들은 늘 빛난다. 그러나 그 순간을 삶에 접붙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연암은 요동벌판을 보고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면서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라고 감탄한 바 있다. 멀리서 자신이 되돌아오는 이 감격은 오직 연필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 올여름에는 반드시 카메라와 전화를 버리고 연필과 노트만 들고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