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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문화산책] 새벽 숲길을 거닐며

평명(平明).

어둠 속, 흙으로 맨발을 푸는 순간, 이 말이 떠올랐다. 새벽을 나타내는 말이다. 평(平)은 평평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평등하다. 명(明)은 밝고, 맑고, 환하고, 깨끗하다. 어떻게 조합해도 아름답다. 온 세상이 골고루 빛으로 차오르는 때, 소나무 청량한 향기가 사방으로 가득하다. 콩잎이 바람에 스륵스륵 소리를 낸다. 이슬을 흠뻑 덮어쓰고도 귀뚜라미는 씩씩하고 우렁차게 노래한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황인숙, 「가을밤 2」) 

아아, 정말 쓸쓸하구나. 처음 물음표 둘은 즐거운 반문이지만, 뒤쪽 물음느낌표 셋은 어쩌면 쓰디쓴 울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름은 아직 물러서지 않았고 가을은 미처 이르지 않았으니, 바람이 불어도 쓸쓸하지 않고 소름이 돋아도 여전히 즐겁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새벽이다. 이런 때에는 홀로라서 더 좋다. 외로움도 감격일 수 있다. 계절이 더 깊어진 뒤에는 같은 어둠이라도 죽음을 재촉하는 듯 매서운 기운을 뿌릴 것이다.

“홀로, 슬며시, 어둡게/ 온 생이 어질어질 기울어지는/ 벼랑 같은/ 밤.”(황인숙, 「가을밤 1」)

아아, 이 “홀로”는 견디기 어렵겠지. 귀뚜라미도 전혀 다르게 울리라. “소슬바람에 가팔라진 가슴/ 베어 물 듯 귀뚜라미 울고”. 그러니 가슴 한쪽이 사라지는 듯, 허전한 가을이 오기 전에 오늘 이 순간의 충만하고 풍요한 가을을 온전히 즐길 시절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말이면 몸을 의지하는 농가 뒷산에 올라 새벽 숲길을 맨발로 걷는다. 신발을 벗고 발바닥이 땅에 닿는 작은 연결로부터, 몸이 번쩍 깨어나고 정신이 스르르 열린다. 처음엔 발이 아플까 다칠까 안절부절못하더니 이슬 젖은 흙을 부드럽게 밟을 때마다 마음이 기뻐하면서 저절로 어깨가 내려간다. 횔덜린은 “살아 있는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것, 행복한 자기 망각 가운데에서 자연의 총체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은 사유와 환희의 정점이자 성스러운 산봉우리이며 영원한 휴식의 장소”(『휘페리온』)라고 말했다. 새벽 숲길을 걷는 산책은, 횔덜린의 이 장소를 내 삶으로 불러들이는 예배다.

눈은 아직 완전하지 않아 사물은 어둠에 숨어 있다. 손으로 가늠하고 발로 느끼면서 몸을 움직여간다.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살갗으로 챙긴다. 때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공기를 맛본다. 눈이 시끄럽지 않으니, 한 발씩 내디뎌 몸을 가눌 때마다 달빛을 빌려서 자연이 낯선 얼굴을 드러낸다. 잘해야 십여 분, 자주 걷지만 한 차례도 똑같은 적은 없다. 오늘의 꽃은 어제의 꽃과 다르고,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과 다르다. 심지어 길 곁 바위조차도 호랑이였다가 곰이었다가 고래로 변한다. 순간이 경이다. “인간이 시인으로 사는”(횔덜린) 시간이다.

동양의 숲이 세상에 뜻을 잃은 은자가 유유자적하면서 천도(天道)로 돌아가는 자성의 공간이라면, 서양의 숲은 흔히 혼돈으로 가득해 길을 잃고 헤매는 공포의 공간이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나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 있었노라”라고 단테는 『신곡』 첫머리에서 읊었다. 하이데거에게 숲길은 진리의 빈터가 도래할 때까지 몸을 애쓰는 은폐와 드러냄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맨발로 지금 걷는 이 숲은 그런 겨울 같은 황량한 숲이 아니다. 풀잎은 이슬로 더욱 싱싱하고, 거미줄은 새벽 첫 빛에 반짝거린다. 감나무가 열매를 한껏 달아 늘어졌다. 

『대학』에 “고요한 후에야 평안할 수 있고, 평안한 후에야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초가을 새벽 산책은 마음에 고요를 이룩하고, 몸을 깨끗이 닦는 시간을 삶에 되돌려준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읊었다. “깊은 숲이라 사람은 알지 못하나/ 밝은 달이 찾아와 비추어주네.” 과연 그렇다. 초가을인데, 어찌 명월을 마음에 띄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새벽 산책을 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