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문화일보》에 기고했던 글이다. 문장과 뜻을 다듬어 여기에 올려 둔다.
“나대로 살면 ‘꼰대’…‘또 다른 삶’ 공감(共感) 위해 문화 즐겨야”
예전에는 인생의 절정이 서른 살 무렵에 온다고 여겼다. 강건한 육체, 뜨거운 가슴, 순수한 이상이 백열(白熱)하면서 세상의 어둠을 정화할 최적의 때라고 믿었다. 지금은 당연히 안다. 삶이 진짜로 고조되는 순간은 넉넉히 세상을 배우면서 시간을 최소한 스무 해는 더 보내야 한다는 것을.
내 생각에, 사람은 적어도 평생 네 차례에 걸쳐 운명을 다시 받는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제의 삶으로 오늘의 명(命)을 새롭게 하는 혁명의 연속으로써 인생을 이룰 뿐이다. 일찍이 공자는 인생을 자술하면서 하나의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뛰어오르는 도약의 순간들을 분명한 말들로 기록한 바 있다.
사람의 첫 번째 운명은 태어나면서 받는다. 아무도 부모를 고를 수 없으므로 이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 즉 숙명(宿命)의 형태를 띤다. 공자는 이때를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두 번째 운명은 열다섯 살 무렵에 내려온다. 세상에 대한 작은 배움을 디딤돌 삼아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늠할 나이다. 공자는 이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스스로 운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 운명을 입명(立命)이라고 부르고 싶다. 청소년기에 어디에 뜻을 두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은 달라진다. 물론 신이 아닌 그 누구도 뜻한 그대로 삶을 이룰 수는 없다. 스무 살과 서른 살과 마흔 살을 거치면서 방황과 전환의 계기들이 수도 없이 인생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청년의 삶이란 대개 열다섯 무렵에 세운 뜻이 현실과 만나서 확장되고 변형되는 일이다. 옛 사람들이 이 나이의 마음공부에 힘을 쏟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바이다.
사람의 세 번째 운명은 쉰 살 무렵에야 찾아온다. 몸에는 오랜 경험이 쌓여 물정을 짐작할 만한 성숙의 때이고, 마음으로는 이 세상에 와서 이룩할 바를 작정하는 대망(大望)의 시기이기도 하다. 공자는 이 나이에 비로소 하늘의 명을 알았다(知天命)고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참된 뜻을 짐작하면서, 하늘이 움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에 작게나마 부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운명은 소명(召命)이라고 할 만하다.
사람의 마지막 네 번째 운명은 죽으면서 받는다. 더 이상 삶의 진행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그대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 남긴 자취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유전자로서 여전히 작용한다. 그 작동 여부가 오직 뒷사람 손에 달렸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마지막 운명을 그대로 종명(終命)이라고 부르고 싶다. 산사람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공자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인생의 진정한 절정은 세 번째 운명, 즉 소명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인문 기획자 김건주의 말을 빌리자면, 소명의 삶이란 “무작정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알고 사는 일”에 해당한다. 나이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원숙함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50대는 그러기에 유리한 나이다. 몸은 충분히 건강해 세상을 호령할 만하고, 체험은 겹겹이 짜여 현실을 떠받치며, 정신은 무르익어 지혜의 빛을 띠어간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좀처럼 방향을 잃지 않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도리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사랑을 얻고 조직에서는 존경을 받기에 정말로 좋은 나이다.
그러나 한국의 50대에게 삶은 오히려 잔혹극이기 십상이다. 마음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육체는 현실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부모는 연로해서 돌봄을 눈치 주고, 아이는 자랐으나 독립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교육비에, 의료비에, 주거비까지…. 세상은 부싯돌 한 줌 마련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몰아치다가 자꾸만 은퇴를 재촉한다.
몽테뉴가 그러했듯이, 삶의 잔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끈질긴 투쟁 없이 소명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생존이 우선하면 사람은 쉽게 속물로 전락한다. 물정은 알지만 속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혜가 찾아온다. 외적 고통을 내적 기쁨으로 전환하는 기적의 축적이 바로 인간됨의 근거다. 현실을 무시하고 정신승리법을 택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험이 가르치는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야말로 최악의 정신승리법이다. 해봐서 아는 현실은 이미 머나먼 과거에 있고, 그 현실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
문화는 ‘내가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살아온 대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삶의 진실에 공감할 기회를 늘려갈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나라. 자기로부터 낯설어지라. 삶의 가치를 새로 다듬으면서 일상의 지층에서 의미의 보물을 캐내는 광부가 되라. 밥벌이의 소중함을 껴안되 밥벌이 자체에는 지지 말라. 문화를 즐기는 것은 타인의 가장 빛나는 삶을 자기 안으로 초대하는 긴급한 연습이요, 새로운 인생을 미리 살아보는 대단한 모험이다. 문화를 통한 연습과 모험 없이 누구도 자기 삶의 끔찍함과 허무를 물리치기 힘들다.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몽테뉴는 스스로를 서재에 가두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열심히 글을 쓰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명해 갔다. 그로부터 지방 소영주에 지나지 않았던 몽테뉴는 『수상록』의 작가이자 ‘성찰적 인간’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50대는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도 인간적 삶의 의미를 묻고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갈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삶을 홑몸으로 견디어가면서 이대로 스러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피가 마르는 초조로 고통당하고 있다. 그러나 갈망과 고통이 있을 뿐, 50대는 밥벌이의 스산함에 쫓기는 탓인지 문화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 《문화일보》 보도에 따르면, 50대의 문화 소비는 20~40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
50대의 내면에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강렬한 동기가 있고, 외부로는 사회의 중추를 담당한 거대한 연결망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이어주는 간절한 꿈(천명)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름은 해소되지 않는다. 읽고 듣고 보고 쓰는 문화적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삶의 다른 가능성을 초대하고 내면으로부터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세상을 더 가치 있는 곳으로 바꾸어 주는 소명이 찾아올 것이다. 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삶에 좋은 날이 올 리 없다. 가혹하기만 한 매일에 시달리면서 좌절과 우울에 지쳐갈 뿐이다. 적극적인 문화 참여를 통해 자신을 해방하고 인간됨의 값어치를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지금 한국의 50대가 가장 우선해야 할 실천일 것이다. 50대의 앞날에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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