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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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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나쓰메 소세키 ― 데라다 도라히코의 『도토리』를 읽고 선생님 나쓰메 소세키―데라다 도라히코의 『도토리』를 읽고 오랜만에 말 그대로 수필집을 후루루 읽었다. 데라다 도리히코의 『도토리』(강정원 옮김, 민음사, 2017)이다. 진주에 문학 강연을 다녀온 후, 피곤해서인지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서, 문득, 화장실에 놓아두었던 것을 들어서 훑어 읽다가 잠들었는데, 새벽에 읽어나 마저 읽었다. 솔직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문장들이 사물로, 사건으로 옮겨 다니는 그야말로 수필(隨筆)의 전형이라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물리학자로 일본 근대수필의 한 봉우리. 자연과 인생의 접점을 응시하는 시선이 웅숭깊다. 가령, 초신성 폭발을 본 후에 쓴 「신성」의 한 구절은 물리학자다운 매력이 넘쳐났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말은 단지 영원한..
편집자로 사는 것, 역시 좋은 일이네요 편집자로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오래전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저자로부터 첫 원고를 받아서 읽는 일이야말로 저한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편으로 도착한 봉투를 뜯어서 원고 뭉치를 꺼내거나 전자 우편에 딸린 첨부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은 감격과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죠. 회사를 나온 후, 출판에 관련한 여러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가겠지만, 그 어떤 일도 첫 원고를 들여다보는 기쁨을 대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아직 텍스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기에 첫 원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반적 얼개는 당연히 잡혀 있지만, 전체가 튼튼하도록 단단한 구조를 세우고, 구체적인 세부를 만지고, 새로 넣을 것과 굳이 뺄 것을 고민하는 일을 편집자가 어떻게 해 내느냐에 따라 ‘책’의 모..
‘작가의 수지’로부터 편집자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작가의 수지’로부터 편집자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봄에 순천향대와 동덕여대에서 시작하는 출판 강의에 소개할 책을 몇 권 추가했다. 제럴드 그로스의 『편집의 정석』(이은경 옮김, 메멘토, 2016), 스가쓰게 마사노부의 『편집의 즐거움』(신현호 옮김, 아이콘북스, 2016), 모리 히로시의 『작가의 수지』(김연한 옮김, 북스피어, 2017), 안정희의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이야기나무, 2015) 등이다. 네 책 모두 훌륭한 점이 있지만, 이중에서 학생들이 가장 신나게 읽을 책은 아마도 『작가의 수지』일 것이다. 돈이야말로 사람을 일단은 들뜨게 하는 법이니까.작가 모리 히로시는 『모든 것이 F가 된다』(박춘상 옮김, 한즈미디어, 2015)로 국내에도 이름이 조금은 알려진, 그러나 일본에서는 2010년 ..
출판은 영원한 벤처야(박맹호 회장 추모사) 《한국일보》에 박맹호 회장님 추모사를 실었습니다. 부음을 듣고 홀로 망연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그룹인 민음사의 출판원리입니다. 아마도 회장님께서 이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새벽에 부음을 듣고, 가슴속 등불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물다섯 살에 어린 나이로 박맹호 회장을 만나 스무 해 넘도록 곁에서 책을 배우고, 편집자의 길을 익히고, 출판의 세상을 경험했다.말년 휴가를 나와 면접에 간 날이 마치 어제 같다.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첫마디는 대뜸 “언제 출근할 거냐?”였다. 엉겁결에 제대 다음 주라고 해버렸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눈빛의 형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대답이 내 운명..
2016년 출판계 키워드 요약 연말이면 한 해 출판계를 정리하는 글을 여기저기에 쓰게 된다. 올해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출판을 들여다보면서 보냈지만,이런 글을 쓸 때마다 몇 마디 말로 책의 풍요를 압축할 수 없어서 상당한 고민을 하게 된다. 출판 전문지인 《기획회의》는 해마다 연말이면 출판계 키워드 30을 뽑아서 한 해의 출판을 정리한다.이 특집이 실린 《기획회의》 429호 여는 글에서 이를 요약해 보았다. 또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솟구침과 곤두박질의 롤러코스터에 적절히 올라타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일은 출판 편집자의 운명과 같지만, 올해는 유난히 일이 많고 말 또한 무성했다. 초연결사회에 걸맞게 순식간에 화제가 응집하고 소멸하는 ‘하이콘텍스트’ 시대가 열리면서 이에 따른 출판의 대응도 기민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앎에..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 미시마 구니히로의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미시마 구니히로,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편집자의 생명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데이터 또는 경험, 또 하나는 영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데이터는 조사로 만들 수 있고, 경험은 일해서 축적할 수 있지만, 영감이 바닥을 치면 끝이라는 것이다. 소진과 고갈의 허탈과 지루를 견뎌낼 만큼의 뻔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루하루를 무의미와 멍 때림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의미의 집적체인 책이 쏟아내는 아우라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미시마샤의 사장 미시마 구니히로도 그랬다. “‘뭘 위해서’ 하는지 잘 모르겠는 일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소화해 내는 와중에, 감각이 마비”되어 “생각해야..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누가 일하는가? _ 책을 만들고 팔고 추천하는 사람들 저자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 출판은 저자와 독자, 쓰기와 읽기를 연결하는 사업이다. 책을 쓰는 것은 저자이지만, 책이 독자 손에 전달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노고를 보탠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 도대체 누가 존재하고,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가? 최근 온라인 매거진 버슬의 맬리사 랙스데일이 기사로 정리했기에, 여기에 옮겨둔다. (1) 첫 번째 독자들 ― 책을 쓰고 나면 저자들은 에이전트나 편집자에게 보내기 전에 첫 번째 독자들한테 읽힌다. 주로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 작가들이다. 그들의 너그러움과 격려가 없었다면 아마도 많은 책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2) 에이전트 ― 한국에는 흔하지 않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출판사 등을 상대로 해서 저자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에이전트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 원고..
책 읽는 독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_ 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 요약 책 읽는 독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 요약 강릉시에서 열린 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의 사회를 보러 갔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독서 운동가, 연구자, 도서관 사서 등이 책을 사랑하는 시민들과 어울려 이틀 동안 여러 주제를 두고 세션 별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후, 이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자리였다. 독서동아리 회원들도 다수 참여하여 끝까지 경청해 주었다. 『2016 독서 컨퍼런스 자료집』에 실린 「책을 사랑했던 민족,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에서 성균관대 철학과 이종관 선생은 ‘인생의 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선물은 책과 함께 책이 열어 주는 의미 세계에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