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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서적 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신동아》에 기고한 글입니다. 청탁받은 주제가 긴급히 교체되는 바람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던 점을 조금 보충했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송인서적 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출판의 운명을 이야기하자니, 자크 데리다의 ‘고슴도치’가 먼저 떠오른다. 데리다는 이 동물을 통해 문학(시)의 운명을 환기한다. 그 고슴도치는, 지금 이 순간, 고속도로 한복판에 멈추어 있다. 어떤 우연한 이끌림에 따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광포한 속도로 한없이 차들은 달린다. 어느새 닥쳐 올 사고를 예감하는 고슴도치는 고개를 가슴께 처박고 잔뜩 웅크린 채 온몸의 털을 세워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리고 목숨을 보전하려는 이 행위 탓에 고슴도치는 스스로 장님 상태가 된다. 사고가 닥칠 것이라는 예감으로 고슴도..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 -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 일반적으로 책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책을 이루는 문장이 만드는 호흡은 읽기의 속도나 밑줄이나 메모의 유무 등을, 심지어 장소까지도 결정한다. 주말에 시골마을에서 읽으려고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을 챙겨 갔다. 올해 여섯 번째 책으로, 청탁과 관계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앞머리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넘친다.“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공포와 굴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위험에 도전한 기록이다. 특히 호기심에 이끌려 저항한 기록이다. 호기심은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온갖 종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길이고, 문제를 미세한 분자로 분해해서..
촛불 이후의 사회를 꿈꾸기 위한 책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촛불 이후의 사회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책을 한 권 추천하고, 그 이유를 짧게 달아 본 것이다. 마이클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 자율. 자기 행동의 서사를 스스로 창조하고 실천하다. ‘촛불’과 함께 민주주의가 우리 스스로에게 명령되었다. 자율적 주체인 시민을 통치의 대상인 신민으로 여기는 어떠한 정치사회 시스템도 굳센 연대를 통해 곧바로 무력화할 것임을 우리는 선포했다. 아고라에서 자율적으로 평화를 이룩한 성숙한 시민의식에 바탕을 두고, 대의제 선거에만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공화(共和)의 원리를 국가와 사회 전반에서 시험할 때다. 지나치게 국가에 정향되고 과도하게 자본에 예속된 사회를 바로잡고, 벌어진 격차를 넘어서 대동(大..
자기를 성찰하면서 사회를 다시 쓰기 - 2016년 한국 출판시장의 흐름 《시사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2016년 출판시장을 몇 가지 흐름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자기를 성찰하면서 사회를 다시 쓰기2016년 한국 출판시장의 흐름 “18년 동안 사익을 한 번도 추구하지 않았다”는 인간-기계가 통치하는 세상은, 틀림없이 무참하고 무의미하며 불행한 지옥일 것이다. 욕망은 타자로부터,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도래한다. 욕망이란 항상 타자에 대한 욕망이기에,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 온전히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고 믿는 자는 자기 삶에서 타자를 뿌리째 뽑아 버린 괴물이다. 그런 존재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자’인 신이거나, 누군가 프로그래밍해 주는 대로 살아가는 꼭두각시 기계일 수밖에 없다. 타자가 보이지 않기에 눈앞에서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한국의 논점 2017』(북바이북, 2016)에 독서에 대한 글을 한 꼭지 실었다. 세밑에 이 책 전체를 훑어 읽었다. 헌법재판소에서 아마도 탄핵이 인용된 후에는 사회 변화를 위한 진짜 싸움이 한국사회 전체에서 분출할 것이다. 과도하게 국가에 예속되고 처참하게 자본에 기울어져 있는 한국사회를 개벽하는 치열한 논쟁이 곳곳에서 벌어질 터인데, 광장의 촛불이 사회 전체로 옮겨 붙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챙기고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한국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이룩할 앞으로의 싸움에서 이 책은 모든 촛불시민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이런 책에 한 꼭지를 맡아서 기쁘고 또 부끄럽다. 아래에 글의 일부를 제목을 바꾸어 옮겨둔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퇴근 후에 노동..
2016년 출판계 키워드 요약 연말이면 한 해 출판계를 정리하는 글을 여기저기에 쓰게 된다. 올해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출판을 들여다보면서 보냈지만,이런 글을 쓸 때마다 몇 마디 말로 책의 풍요를 압축할 수 없어서 상당한 고민을 하게 된다. 출판 전문지인 《기획회의》는 해마다 연말이면 출판계 키워드 30을 뽑아서 한 해의 출판을 정리한다.이 특집이 실린 《기획회의》 429호 여는 글에서 이를 요약해 보았다. 또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솟구침과 곤두박질의 롤러코스터에 적절히 올라타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일은 출판 편집자의 운명과 같지만, 올해는 유난히 일이 많고 말 또한 무성했다. 초연결사회에 걸맞게 순식간에 화제가 응집하고 소멸하는 ‘하이콘텍스트’ 시대가 열리면서 이에 따른 출판의 대응도 기민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앎에..
‘될 만한 책’이라는 사고방식을 넘어서 《기획회의》 여는 글로 쓴 글입니다. 출판 현장의 여러 선후배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될 만한 책, 어디 없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립니다. ‘한 방’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겁니다. 저는 항상 이 말이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이 같은 자연스러움을 얻었을까를 고민하곤 했습니다. 잘 팔리는 책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출판 사업의 핵심이지만, ‘될 만한 책’이 사업 운영의 중심에 서는 출판은 적어도 직원들과는 함께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회사의 장기적 가치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괜찮은 출판사의 연매출이 소기업 수준에 대부분 머무르는 이유도 출판사업의 기본 구조가 이 말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얼마전 SBI 학생들이 출판계에 입문하기 위한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이..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 미시마 구니히로의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출판의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난다― 미시마 구니히로, 『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윤희연 옮김,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편집자의 생명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데이터 또는 경험, 또 하나는 영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데이터는 조사로 만들 수 있고, 경험은 일해서 축적할 수 있지만, 영감이 바닥을 치면 끝이라는 것이다. 소진과 고갈의 허탈과 지루를 견뎌낼 만큼의 뻔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루하루를 무의미와 멍 때림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의미의 집적체인 책이 쏟아내는 아우라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미시마샤의 사장 미시마 구니히로도 그랬다. “‘뭘 위해서’ 하는지 잘 모르겠는 일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소화해 내는 와중에, 감각이 마비”되어 “생각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