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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소설의 진짜 재미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동아일보 인터뷰)



역시 한 달 전쯤 《동아일보》 김지영 기자랑 인터뷰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수다도 떨었습니다.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북21에서 한국소설의 표지를 분석해서 낸 보고서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내용 자체의 깊이도 깊이이지만, 이런 시도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자들은 소설에서 재미와 의미를 함께 얻고자 하는데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들은 재미는 빼고 의미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설 카피뿐 아니라 한국 소설의 엄숙한 내용을 아우르는 지적임은 물론이다.


오해가 조금 있을까 봐 덧붙여 둡니다. 소설 자체가 ‘의미를 향한 강박’을 갖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언어의 동굴에서 세계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는 광부가 바로 작가나 시인 같은 문학자이니까요. 제가 말하는 재미는 단지 당의정 같은 게 아닙니다. 독자들 입맛에 쩍쩍 달라붙는 흥미로운 이야기 좀 써보라는 게 아닙니다. 독자들은 문학적 세계가 자신의 삶과 깊이 이어져 있다고 느낄 때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주변의 삶에 대한 탐구가 더 강렬해지고, 그 탐구가 하나의 독특한 이야기나 화법으로 나타나서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 생겨나야 재미있는 겁니다. 

편집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문학 담론이 교환되는 장의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저 역시 거기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함을 전제로 두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무거운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관념적인 어휘들의 조합”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어휘들이 시민들의 삶과 아무 관계없이 배설되고 있다는 게 진짜 문제입니다. 

가령, “그의 소설은 부재하는 목소리를 존재하도록 만들었다.”라고 이야기해 보죠. 으악, 어렵다고요. 

그러나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시예비치는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 있던 약자의 목소리를 수천 명 인터뷰를 겹겹이 쌓아서 기록했습니다. 체르노빌,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그의 작품을 거쳐서 비로소 다른 역사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강 역시 『소년이 온다』에서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시민적 삶과 연결되어 있다면 관념은 오히려 재미가 됩니다.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면 단지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한국 소설을 이야기하는 담론이 답답한 것은 아마도 말놀이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스템 안에 있을 때에는 이게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평론가든, 편집자든, 자신이 그 일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미 느낀다는 겁니다. 듣는 사람을 생각지 않고 말하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는 편향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북21 팀에서 이런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경험 많은 문학 편집자가 있고, 또 그 경험과 진지하게 대화해 보려는 마케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전문성 있는 외부자 시선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겠죠. 한마디 덧붙이면, 시민들한테, 일반 독자들한테 전달되지 못했다면, 전문가들에게도 아마 전달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점을 인터뷰하면서 부각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래에 김지영 기자의 기사를 옮겨둡니다.




[김지영 기자의 문학뜨락] 소설 표지 카피, 누구를 향한 글인가


21세기북스 문학기획팀이 최근 낸 트렌드 보고서는 흥미롭다. 올 1월부터 9월 초까지 출간된 한국 소설 100여 종의 홍보 문구를 살펴본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책의 띠지와 표지의 카피를 통해 본 결과 한국 소설의 주제는 4가지 정도로 모아졌다. △쇠락 △소외 △사랑 △행복 등이었다. ‘쇠락’은 인간의 노화나 일상의 파괴, 세계의 몰락 등을 다룬 내용이 주를 이뤘다. ‘소외’에는 고독과 상실 등의 주제가 포함됐다. ‘사랑’과 ‘행복’의 경우 ‘그래서 사랑하고 행복했다’는 해피엔드의 결말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하고 행복을 얻지 못해 암울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카피 경향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는 대개 엄숙하고 진지한 단어들의 나열로 이뤄졌다. ‘욕망’ ‘세계’ ‘운명’ ‘고독’ ‘부재’ ‘천착’ ‘도저하다’ 같은,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홍보 문구에 자주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무거운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관념적인 어휘들의 조합은 문학 출판사들이 고수해온 카피 트렌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띠지나 표지의 홍보 문구는 책이 독자와 가장 먼저 만나는 구절이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홍보 문구가 일반 독자들에게 낯설고 생뚱맞게 느껴지는 단어라면?(사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릴 때 ‘부재’나 ‘천착’ 같은 단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최근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에 사용되는 어휘들은 대개 비평가들의 평론에서 많이 사용되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른바 ‘문학 판의 전문용어’인 셈이다. 이런 전문적인 용어가 일반 독자들을 향한 홍보 문구로 쓰이는 데 대해 김 교수는 “그만큼 한국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 출판사가 독자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비평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출판사 편집장도 “이런 홍보 문구가 작품에 문학적인 아우라를 만들어준다고 여겨졌겠지만 실제로는 일반 독자와 고급 독자를 경계 짓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장강명 김중혁 김려령 씨의 소설을 주목했다. 기간제 결혼을 다룬 김려령 씨의 ‘트렁크’는 ‘서른 살, 다섯 개의 결혼반지’를, 김중혁 씨의 ‘가짜팔로 하는 포옹’은 ‘김중혁 첫 연애소설집’을 카피로 내세웠다. 장강명 씨의 소설 표지는 띠지 없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만 실렸다. 올해 출간돼 모두 1만 부 이상 찍은 이 책들의 카피는 간소하고 어렵지 않은 어휘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자들은 소설에서 재미와 의미를 함께 얻고자 하는데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들은 재미는 빼고 의미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설 카피뿐 아니라 한국 소설의 엄숙한 내용을 아우르는 지적임은 물론이다.


김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