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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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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
인공지능의 대가가 삶의 마지막에서 깨달은 것 “언제나 계산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보는 태도는 우리 내부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좀먹어요. 우리한테 진정한 삶을 살게 해 주는 사랑을 질식사시켜요.”조용한 산사에서 타이완의 싱윤 큰스님이 말한다. 눈물을 흘리며 듣는 사람은 구글차이나 설립자이자 창신그룹 회장인 리카이푸. 『AI 슈퍼파워』(이콘)의 한 장면이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전문가인 리카이푸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공부해 인공지능 연구의 첨단에 있었고, 인공지능 경제가 새로운 발견의 시대에서 빠른 실행의 시대로 전환되었음을 통찰함으로써 글로벌비즈니스의 정점에 섰다.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도 들었다. 날개를 단 채 하늘로 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순간 멈추었다. 2013년..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세월호 3주기 날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중앙선데이》에 4주마다 한 번씩 쓰는 칼럼. 문학과 슬픔에 대해 다루어 보았습니다.인류 최초의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슬퍼하는 영웅 길가메시로부터, 『일리아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는 영웅 아킬레우스로부터, 「공무도하가」는 백수광부과 그 처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여옥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문학의 기원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날이 풀렸다 싶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앞 냇가를 걷는다. 새벽 첫 빛에 어슴푸레 반짝이는 물살들. 물결이 가볍게 뒤척일 때마다 몸속에서 물이 함께 출렁인다. 푸석한 삶을 견디다 못해 물소..
인간이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중앙선데이》에 연재하는 에세이. 이번에는 터키의 소설 『살모사의 눈부심』을 가지고 권력에 중독된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사랑을 모르는 채로 자라서 황제가 된 소년은 전횡을 일삼다, 정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간신히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무스타파 1세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다 쓴 작품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이 읽으면 좋을 듯해서, 조금 고쳐서 아래에 옮겨 둡니다. 한 소년이 있다. 어린 시절, 잔혹하고 무참한 장면과 마주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율법에 따라 집안 형제들을 모조리 목 졸..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중앙선데이》에 ‘멕베스’ 테마를 가지고 짤막한 에세이를 한 편 썼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인생의 스승이신 박맹호 회장님 부고를 받았습니다. 이 에세이에 어떤 공교로운 예감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이 미어집니다. 마음을 가눌 수 없네요.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맥베스는 전쟁영웅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싸움에 나아가 혁혁한 공업을 쌓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녀가 유혹한다. “왕이 되리라.”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이후에 그의 행적은 얼마나 끔찍한가. 충성을 바치던 왕을 시해하고 자리를 강탈하며,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정적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암살한다. 맥베스의 전락은 그가 기어올라간 높이만큼이나 끔찍하고 비참하다. 암살을 부추긴 아내가 자살로 피의 빚을 갚은 후, 임박한 파멸을 예감하..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 _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중국도서전에 갔을 때 가져가서 읽었던 책입니다. 아주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 조금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오후에 잠깐 짬을 내서 느낌을 옮겨 보았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대면하고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 청년 의사의 마지막 나날이 아름다운 문체로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6)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함께 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게다가 그 책이 아름다운 문장과 단단한 인식이 어우러져 읽는 즐거움마저 더한다면 바랄 나위 없다. 일상의 덧없음이 세월을 좀..
[21세기 고전]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과 싸우다 _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민음사) 한 인간의 죽음, 그중에서도 살인을 소설화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한 작가의 진정한 재능은 심지어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과정의 개연성을 온전히 구축하는 일만 해도 보통 난해한 일은 아니다. 재능 없는 작가들은 서사적 가치가 없는 우발로 처리하거나, 원한과 복수라는 흔해빠진 구조에 호소하거나, 사이코패스 같은 타고난 살인마를 출현시키는 등 삼류의 수법을 통해 살인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지적 태만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태만에 속아 넘어가는 독자는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등 출판 당시의 사회적 주목 여부와 상관없이, 살인을 그려낸 작품 중에 시간의 시련을 이길 정도로 훌륭한 소설이 거의 드물지도 모른다.현실에서든 이야기..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④] 7080 세대, 더 늦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라! _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초고령사회를 맞이하는 지금 읽어야 할 책 장은수 : 이 책이 현재까지 약 2만5000부 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올해 인문학, 자연과학 분야 신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입니다. 아마 7월, 8월 신간을 다 합쳐도 이만큼 성과를 낼 가능성 있는 책이 없을 겁니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음식의 언어』(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펴냄) 정도가 있겠네요. 우선 책을 읽은 소감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이홍 : 삶과 죽음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결코 함부로 답할 수 없는 질문과 과제를 담고 있습니다.우리가 이 책을 선정하면서 책의 분류에 대해 출판사와 질문을 주고받았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인문학으로 분류했는데, 장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