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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중앙선데이》에 ‘멕베스’ 테마를 가지고 짤막한 에세이를 한 편 썼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인생의 스승이신 박맹호 회장님 부고를 받았습니다. 이 에세이에 어떤 공교로운 예감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이 미어집니다. 마음을 가눌 수 없네요.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맥베스는 전쟁영웅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싸움에 나아가 혁혁한 공업을 쌓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녀가 유혹한다. 

“왕이 되리라.”

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이후에 그의 행적은 얼마나 끔찍한가. 충성을 바치던 왕을 시해하고 자리를 강탈하며,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정적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암살한다. 맥베스의 전락은 그가 기어올라간 높이만큼이나 끔찍하고 비참하다. 암살을 부추긴 아내가 자살로 피의 빚을 갚은 후, 임박한 파멸을 예감하면서 그는 허망함에 사로잡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린다.

“꺼져라, 꺼져라, 숨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같은 건데 소음과 광기가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인생을 ‘숨 짧은 촛불’에 비유한 것은 진실로 탁월하다. 누구나 영원히 타오르기를 열망하지만, 불꽃이 꺼지고 어둠의 영토에 갇히는 결국을 아무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김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죽음 앞에서, 맥베스는 자기 인생의 완벽한 불모성을 선언한다. 

어느덧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홀로 적막에 갇힌 채,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맥베스는 외친다. 아아, 나의 행적을 찬미하던 떠들썩한 소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상승을 나날이 바라던 미칠 듯한 열망은 어느 곳에서 증발해 버렸는가. 일생을 이모저모 살피고 나서 마침내 맥베스는 우리를 향해 선포한다. 

“의미는 전혀 없다.”

인간의 정점에 오른 자가 막장을 앞두고 독백하는 이 장면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하고 결정적이어서 절망적 암울함마저 불러일으킨다. 삶의 굴곡이 불러들이는 심각한 고뇌 속에서 인생을 다시 쓰는 통찰이 셰익스피어 비극의 섬뜩한 매력이다. 가슴 내려앉는 서늘함이 척추를 타고 오르면서 전율을 전달하다가 마침내 뇌리를 두들겨 깨달음의 스위치를 올린다.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그렇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극도로 부조리하다. 우리 인생이 활력 넘치든 지루하든, 훌륭하든 비참하든 간에 죽음의 사신이 찾아오는 순간,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그다음에는 절대적인 무(無)가 우리를 집어삼킨다. 황금 같은 지위도, 실타래 같은 인맥도, 산더미 같은 재산도 전혀 소용없다. 맥베스가 말하듯, “의미는 전혀 없다.” 우리는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자’로 바뀌는 것이다.

최근 베스트셀러 『인생의 발견』에서 시어도어 젤딘은, “돈을 버는 것이 여전히 매력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의 쾌락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만약에 부자의 현실이 낱낱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번영에 몰두하는 경제의 장점에 대해, 부의 축적과 지출에 대해 좀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젤딘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전제로 붙인 가정은 옳지 않다. 부나 권력에서 인간의 정점에 오른 자들의 현실은 넘쳐날 정도로 ‘낱낱이’ 밝혀져 있다. 풍요한 물질이나 존귀한 지위가 삶의 공허를 해갈하는 데 무척이나 무능하다는 것을, 『맥베스』와 같은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그 엄연한 사실이 대다수에게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인류 최초의 문학 중 하나인 『오뒷세이아』는 이미 말한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다스리느니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뱅이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이 말을 오뒷세우스에게 한 사람은 『일리아스』의 주인공이자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우스다. 죽을 운명을 알면서도 전장으로 나섰고, 명예와 복수를 위해 자기 죽음의 운명을 언제든 받아들이겠다던 그 사람이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바뀔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가장 큰 축복이다. 아무리 대단한 눈알도 거울 없이 자신을 비추지 못한다. 자기 삶을 제대로 성찰하려면,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 삶에서 유일하게 실감할 수 있는 완벽한 타자일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아마 인간은 절대로 돌이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리라.

아킬레우스의 일화는 저승에서 영웅으로 사느니 이승에서 개똥밭을 구르라는 말이 당연히 아니다. 죽음의 완전한 소외를 환기하면서 우리에게 이승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 질문은 참으로 절박하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우리에게 이 질문을 하도록 강요한다. 회한이 몰아치고 비애가 사무치는 그때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맥베스의 경우처럼 말이다. 

문학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을 체험시킴으로써 우리의 눈이 인생의 진실을 향하도록 교육한다. 인류에게 문학이 있는 이유는 분명히 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