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에 연재하는 에세이. 이번에는 터키의 소설 『살모사의 눈부심』을 가지고 권력에 중독된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사랑을 모르는 채로 자라서 황제가 된 소년은 전횡을 일삼다, 정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간신히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무스타파 1세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다 쓴 작품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이 읽으면 좋을 듯해서, 조금 고쳐서 아래에 옮겨 둡니다.
한 소년이 있다. 어린 시절, 잔혹하고 무참한 장면과 마주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율법에 따라 집안 형제들을 모조리 목 졸라 죽인 것이다. 어머니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파리 한 마리가 날아도 놀라서 펄쩍 뛰는 환자”가 된다. 죽음의 불안이 수시로 침입할 때마다, 그 마음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악몽은 광기가 되어 서서히 그를 잠식한다.
“나는 행복과 죽음 사이를 왕래하는 유혈의 시계추 속에서 몇십 년을 살았다. 나는 몹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 어떤 속삭임 혹은 나뭇잎 사이를 배회하는 바람소리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그런 중요한 습관 때문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년의 시종 슐레이만의 독백이다. 그는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에티오피아 사막에서 납치된 후 거세된 채 궁정에 시종으로 팔려 왔다. 우연한 작은 실수가 번져서 권력 간 유혈로 흔하게 귀착하는 궁정 생활은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었고, 그는 움직일 때마다 사방을 조심하면서 가슴을 졸여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가 모시는 소년의 삶 또한 무에 달랐으랴. 소년은 마음을 공포에 숙주로 내준 채, 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목이 졸리는 듯, 비명을 거세게 지르면서 조마조마함을 산다. 심지어 소년을 살려준 어머니조차도 사랑의 존재가 전혀 아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망과 달리, 할렘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백조처럼 우아하게 사는 곳”이 아니다. “사랑과 노래와 춤의 천국”이기는커녕 “울음과 슬픔의 세계”이며, “음모와 질투의 전장”이다. 소년의 어머니인 황태후는 어린 시절 궁으로 들어와 할렘의 치열한 생존장을 버티고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절대로 내주기 싫어서 그녀는 주변세계 전체를 음모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황태후는 자기 마음에서 모성마저 쫓아낸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져올 연약함이 마음에 틈을 만들고, 그 틈이 자라서 끝내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지독한 불안의 완전한 노예가 된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이들은 물론, 제국 안에서 자기보다 힘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황후”가 생겨나지 않도록 조처한다. 아들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리고자 “아들을 어릴 때부터 여자들과 격리”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제국의 가장 교태스러운 미소년들을 침실로 보내 동침시켰고, 결국 그녀의 아들들은 여자를 혐오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큰아들은 과연 걱정을 끼치지 않았고, 걸림돌이 될 후사도 없었다. 큰아들이 죽고 난 후, 황태후는 자신이 이미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또한 죽음의 공포에 항상 쫓긴 탓에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감히 품을 수조차 없었던 소년을 황위에 올린다.
권력 중독은 이토록 무섭다. 그것은 양심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무너뜨린다. 피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도전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끔찍한 독점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부대끼는 사랑의 살 냄새보다 권력의 피비린내를 먼저 맡은 인간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아마도 그는 필멸을 향해 달려가는 짤막한 인생에서 정말로 무엇이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자라면서 그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기록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태어난 영웅이다. 이 서사시는 넘치는 힘을 어찌할 수 없어서 청년을 괴롭히고 처녀를 학대하던 길가메시가 엔키두라는 친구를 만나 우정을 안 이후 자기 힘을 공적인 일에 쓰는 것을 첫머리에 보여 준다. 길가메시는 숲지기 훔바바를 죽인 후 거대한 삼나무를 가져다 도시의 성문을 마련하고, 하늘의 황소를 죽여서 가뭄을 해결하며, 침략하는 적을 무찔러서 나라의 위엄을 세운다. 이 서사시는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존재만이 자기 내면의 야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채, 황제가 된 소년은 어떠했던가. 살아감의 길에서 권력에 대한 오롯한 추구 말고 어떠한 의지도, 욕망도 없는 인간을 ‘괴물’이라고 한다. 소년은 괴물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괴물 자체이기도 하다. 황제가 되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자마자 갑자기 그의 광기와 욕정이 둑을 넘는다. 친척들을 무참히 죽이고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자신이 느껴온 공포를 타자에게 주사할 때마다 그는 삶의 희열을 만끽한다. “자, 누구부터 죽일까?”
동시에 억눌린 욕정이 폭발하면서 그는 주변의 온갖 여자를 후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못한 채로 길을 잃는다. 자라면서 한 차례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던 탓이다. 욕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제국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를 찾고, 그녀의 몸을 탐닉하기에 이른다. “죽음처럼 고요한, 제국을 채울 만큼 넓고 깊은 자궁 속”에 아늑히 숨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의 무질서한 폭주와 뚱뚱한 후궁에 대한 사랑에 위기를 느낀 황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단숨에 내쫓고, 손자를 제위에 올린다. 한때 세상의 4분의 1을 다스리던 황제는 “창문조차 봉쇄된” 방에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감금되어 버린다. 갑자기 ‘괴물 놀이’가 중지되고, 황제는 죽음에 쫓기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황제의 곁에 슐레이만이 있다. 은밀하게 신분 상승을 꿈꾸는 슐레이만은 황제에게 아들 황제를 죽이고 그를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살짝 전한다. 황제는 크게 기뻐한다. “나의 종들이 나를 잊지 않았단 말이지! 내 권리를 찾아 주려고 한단 말이지!”
슐레이만은 자신의 잘못으로 쫓겨난 와중에도 끝까지 권력에 집착하는 황제를 속으로 한바탕 비웃는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밀실에서 살아가면서, 황제는 조금씩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친다. 황제에 오른 후 전횡을 저지르는 와중에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황제라는 권력에 취해 세상을 농단하면서 오직 어머니의 사랑만을 바랐던 자신이, 생명의 소중함에 몸부림쳤던 소년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황제는 제국의 황실에 유전하는 죽음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결심을 한다. 아들을 향한 음모를 중단시킨 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는 말한다. “나는 결정을 내렸어. 절대 내 자식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일세.”
시간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생의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자’로 전락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위대한 업적을 쌓은 영웅 길가메시조차 그러했다. 함께 어깨를 겯고 세상을 종횡했던 친구 엔키두가 죽은 후, 길가메시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자신도 결국에는 죽어서 온몸에 벌레가 가득하고 먼지로 꽉 찬 존재가 될 것임을 깨닫는다. 저승에 간 엔키두는 말한다. “내가 갔던 ‘먼지의 집’에는 많은 왕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왕관은 벗겨진 채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로소 발휘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온전히 수용하는 결단이야말로 우리에게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가져다주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준다. 죽음을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서 떠도는 길가메시에게 여신 시두리는 말한다.
“길가메시여,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매일 밤낮으로 즐기십시오. 매일 축제를 벌여서, 춤추고 노세요. 밤이나 낮이나, 낮이나 밤이나 상관없어요. 눈부시고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는 씻고 몸은 닦고, 당신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아내를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 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이에요.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몫이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전락한 황제는 사방이 막힌 방에서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근친 살해의 악무한을 멈춘다. 그 순간, 슐레이만은 광기에 젖어 세상을 농단했던 황제에게 다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돌려준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괴물로 살았더라도, 괴물로 생을 끝내지 않고 인간으로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인과 욕정에 중독되었던 광인 황제는 보여준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거센 발버둥이 아니라, 그 운명을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어긋난 삶의 질서를 되돌리는 결단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길가메시 서사시』는 말한다. 신들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은 존재인 우트나피시팀은 우리 필사의 존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 순간, 비로소 참된 자신을 발견한 황제 이야기는 터키의 작가 줄퓨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에 나온다. 요즈음 들어, 문득, 이 작품을 사람들과 함께 꼭 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때문은 아니다. 그저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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