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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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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미래] 뻔뻔함과 부끄러움 “노인장! 눈 깜짝할 사이에 개들에게 큰 봉변을 당할 뻔했구려. 그랬다면 그대는 내게 치욕을 안겨주었을 것이오.”(『오뒷세이아』 14권 37~39행)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오랜 방랑 끝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귀향한다. 거지꼴을 한 그가 찾은 곳은 고향 이타케 성 외곽에 있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집이다. 그런데 추레한 늙은이가 집 앞을 기웃대자 사나운 사냥개들이 먼저 그에게 달려든다. 에우마이오스가 재빠르게 바깥으로 나왔기에 망정이지, 천하의 오뒷세우스가 개한테 물리는 망신을 살 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에서 후세가 기억하는 것은 오뒷세우스의 봉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나그네의 고통을 자신의 치욕으로 받아들인 에우마이오스의 환대다. 이 수치심이 윤리의 출발을 이루기 때문이다. ..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이번에는 다가올 휴가철을 맞아서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최고의 여행은 카타바시스, 즉 저승여행입니다. 살아서 죽음을 겪는 것, 산고를 겪고 여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조금 보충했습니다.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소년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떠났다. 숙부네 집에 얹혀살면서 인쇄 견습공 일을 하던 소년은 열여섯 살 때 처음 여행을 한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오는데 성문이 닫혀 있었을 뿐이다.“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야훼의 명령을 받고 기꺼이 집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어떤 운명을 느낀 소년은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몸을 돌려 길을 떠난다. 며칠 동안 제네바 성 주변..
[풍월당 문학 강의] 부조리한 이 생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문학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문학을 읽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한 달에 한 번,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문학의 고전들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2015년에 처음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두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올해 초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길가메시 서사시』 등 이야기의 기원에 관한 책들을 같이 읽었고, 이달 4월부터는 새롭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첫 번째로 고른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어서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 달에 한 작품씩 연속으로 읽을까 합니다. 강..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중앙선데이》에 4주에 한 번씩 문학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대규모 몰락과 전락의 시절을 맞이해서 ‘리어왕’ 주제를 변주해 보았습니다. 삶이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전락의 고통 없이 어떤 인간도 자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밑바닥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만이 삶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권력의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들이 줄줄이 떨어지는 계절에, 문득문득 떠오르던 것들을 가볍게 적어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는 행복했다. 브리튼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였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고, 아름다운 딸도 셋이나 있었다.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준 후, 딸들 집을 교대로 돌아다니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다.그러나 리어의 계획은..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중앙선데이》에 ‘멕베스’ 테마를 가지고 짤막한 에세이를 한 편 썼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인생의 스승이신 박맹호 회장님 부고를 받았습니다. 이 에세이에 어떤 공교로운 예감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이 미어집니다. 마음을 가눌 수 없네요. 문학은 왜 존재하는가 맥베스는 전쟁영웅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싸움에 나아가 혁혁한 공업을 쌓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녀가 유혹한다. “왕이 되리라.”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이후에 그의 행적은 얼마나 끔찍한가. 충성을 바치던 왕을 시해하고 자리를 강탈하며,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정적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암살한다. 맥베스의 전락은 그가 기어올라간 높이만큼이나 끔찍하고 비참하다. 암살을 부추긴 아내가 자살로 피의 빚을 갚은 후, 임박한 파멸을 예감하..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9> 군사독재 어둠을 깨며 함께 읽기 35년 (시흥 상록독서회) “저도 형님들한테 듣기만 했습니다. 첫 인연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독서회가 출발한 것은 1981년부터죠. 지금은 영등포 평생학습관에서 만나지만, 그전에는 구로도서관에서 스무 해 동안 함께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시흥의 헌책방 ‘씨앗글방’ 뒤쪽의 골방에서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씨앗독서회였습니다.”기억의 샛길을 더듬느라 정화양 씨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수줍고 쑥스럽게 입술이 세월을 탄다. 상록독서회는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독서공동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1970년대 말 시흥의 달동네에서 열린 한 야학에 다녔던 청년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요즘처럼 배움이 흔하지 않을 때, 야학은 집안사정 탓에 배움을 얻거나 계속하지 못한 이들이 어울려 배우던 시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