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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중앙선데이》에 4주에 한 번씩 문학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대규모 몰락과 전락의 시절을 맞이해서 ‘리어왕’ 주제를 변주해 보았습니다. 삶이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전락의 고통 없이 어떤 인간도 자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밑바닥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만이 삶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권력의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들이 줄줄이 떨어지는 계절에, 문득문득 떠오르던 것들을 가볍게 적어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는 행복했다. 브리튼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였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고, 아름다운 딸도 셋이나 있었다.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준 후, 딸들 집을 교대로 돌아다니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리어의 계획은 본래대로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획의 첫걸음을 떼자마자 가장 아끼는 막내딸 코널리어가 오히려 리어의 계획에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만 사랑하는 것은 남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라나 뭐라나. 그 말을 들은 리어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녀에게 줄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이를 말리는 충직한 신하마저 쫓아낸다. 일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끝에 사랑과 충성을 한꺼번에 상실한 것이다.

발화(發話) 자체가 실현인 것은 오직 신만이 가능하다. 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인간의 격을 넘어서는 고집은 리어의 마음속에서 오만을 잉태하고, 결국에는 파멸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는다. 물론 리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이 뜻한 바대로 살아가려 한다.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한 번에 상실하는 전락의 그날이 올 때까지, 이미 인생 시계가 어긋났는지 모르는 상태로 아무 일 없는 듯 사는 것 또한 인간의 일이다.

리어는 여전히 오만하다. 두 딸의 집을 오가면서, 지금도 왕인 듯 제멋대로 살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딸은 리어가 귀찮기만 하다. “멍청한 늙은이, 자기가 주어버린 권력을 아직도 휘두르려고 하다니.” 노골적으로 리어의 행세에 반발하다가 기어이 내쫓아버린다. 존귀한 리어가 올데갈데없는 노숙자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황막한 광야의 어둠 속에서 리어는 절규한다.

“여기 날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리어가 아니다. 리어가 이렇게 걷고 이렇게 말하는가? 두 눈은 어디 갔는가? (중략) 하, 자는 거야? 깨어 있는 거야? 분명코 그것은 아니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장이고, 교수이고, 기자이고, 국장이고, 위원장이라고 말한다. 완장 안 찬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회가 호명하는 대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자리의 주체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 ‘무엇’이 정말로 나일까? 내가 ‘무엇’일 때 나라면, 내가 그 ‘무엇’이 아닐 때에는 ‘나’가 아니란 말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는 경고했다. 인간은 자꾸 ‘누구’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한다고. 

리어는 왕이라는 사회적 표지를 잃어버린 자신이 아직도 낯설다. 여전히 그는 왕처럼 말하고 걷고 움직이고 싶어 한다. 지금의 이 전락해 버린 삶이 마치 꿈인 듯이 여겨진다. 전락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서서히 정신이 분열되어, 여기 있는 자신은 그림자이고, 진짜 자신은 분명히 다른 데 있을 것만 같이 느낀다. 리어의 호접몽(胡蝶夢)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리어의 외침은 이인화의 소설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나의 대학 한 해 선배다. 문학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 얼굴은 빛났다. 말은 매끄럽고, 글은 아름다웠다. 명민한 통찰이 있었고, 상냥한 품위가 있었다. 그는 서른 초반에 벌써 명문대학의 교수였고, 『영원한 제국』이라는 밀리언셀러의 작가였으며, 스토리텔링이라는 초유의 영역을 개척하여 그 분야의 선구자로 남았다. 주광성 동물인 듯, 그가 하는 일에는 언제나 빛이 비추었고 알맞은 출세가 따랐다.

그리고 스무 해 만에 그는 후배들의 영웅에서 한갓 없는 수인으로 전락했다. 세 평이 부족할 영어(囹圄)의 공간에서, 그가 서사의 미래가 펼쳐질 장으로 그리도 집착하던 스크린이 없는 그 공간에서, 도대체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눈앞에 놓인 텅 빈 흰 벽에 떠오른 문자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리어와 같은 신세가 된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까.

두 딸의 집 사이에는 황야가 있다. 비바람 가릴 곳조차 마땅하지 않는 황막한 곳이다. 리어는 이 황야에서 세 번 머무른다. 첫 번째는 큰딸에게 쫓겨났을 때, 두 번째는 작은딸에게 쫓겨났을 때, 세 번째는 불쌍한 아버지를 찾아온 막내딸을 볼 면목이 없어서. 황야를 한 차례씩 지날 때마다, 리어는 자기 생애에서 획득한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전락해 간다. 몰아치는 폭풍우로부터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다.

“문명을 떨쳐 버린 인간은 바로 너처럼 불쌍한 알몸의 두 발 짐승에 지나지 않아. 벗자, 벗어, 빌린 것들을! 자, 여기 단추 좀 끌러 다오.”

리어의 또 다른 절규다. “불쌍한 알몸의 두 발 짐승”이라니!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간 리어는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알몸의 두 발 짐승’으로 몰락한다. 리어가 획득한 이 알몸 상태야말로 결국에는 인간 모두가 가 닿을 곳의 이름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리어의 추락을 일말의 동정도 없이 묘사한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프랑스 군대를 끌고 돌아온 코딜리어마저 패전의 굴레를 씌운 후,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한 줄기 희망의 빛조차 제거된 완벽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리어는 자신의 진짜 열망을 발견한다. 세속적 집착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리어는 애원한다.

“제발 이 단추 좀 끌러 다오.”

리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도, 10여 년에 걸친 항해와 모험 끝에 모든 것을 잃은 후 샅 가릴 옷 한 점 없이 벌거숭이로 귀향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어떤 여인이 도시와 자식들로부터 저 무자비한 날을 물리치다가 자신의 도시와 백성들 앞에서 전사한 사랑하는 남편 위에 쓰러져 통곡하듯이, 꼭 그처럼 애절하게 오뒷세우스의 눈썹 밑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오뒷세우스의 참모습은 세이렌의 노래가 약속했던 불멸의 영웅이 아니라 패배자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였다. 그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청동을 휘두르는 용사가 아니라 자신이 파괴한 도시의 가장 비참한 약자로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은 남편이 허우적거리며 죽어 가는 것을 보고는 그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하는데 뒤에서 적군이 창으로 그녀의 등과 어깨를 치며 노고와 고난을 겪도록 그녀를 노예로 끌고 가니 더없이 애절한 슬픔이 그녀의 두 볼을 시들게 한다.”

호메로스는 “꼭 그처럼 애절하게” 오뒷세우스가 울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고쳐 부르고’ 싶었던 것이고, 『일리아스』 뒤에 『오뒷세이아』가 쓰여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호메로스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오뒷세우스에게서 영웅의 표지를 모조리 빼앗은 채 그를 고향 이타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따르면, 제아무리 훌륭한 인간도, 생의 마지막에는 벌거벗은 존재로, 제 한 몸 가누지 못하는 완벽한 무력함 속에서 죽어 간다. 생의 마지막에 죽음이 있는 한, 인간의 몰락은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무엇이 아닌 자’일 때의 ‘누구’가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가 그 ‘누구’를 떠올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바 역시 반드시 달라질 것이다. 리어에게 그것은 사랑하는 딸 코딜리어와 함께하는 것이었고, 오뒷세우스에게 그것은 “남편과 아내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집을 지킬 때” 찾아오는, 오로지 두 사람만 누릴 수 있는 ‘명성’을 얻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