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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이번에는 다가올 휴가철을 맞아서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최고의 여행은 카타바시스, 즉 저승여행입니다. 살아서 죽음을 겪는 것, 산고를 겪고 여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조금 보충했습니다.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소년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떠났다. 숙부네 집에 얹혀살면서 인쇄 견습공 일을 하던 소년은 열여섯 살 때 처음 여행을 한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오는데 성문이 닫혀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

야훼의 명령을 받고 기꺼이 집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어떤 운명을 느낀 소년은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몸을 돌려 길을 떠난다. 며칠 동안 제네바 성 주변을 떠돌던 소년은 가톨릭 사제의 도움을 받아서 개종을 위해 토리노를 향한다. 그로부터 소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토리노에 도달한 그는 이 도시에서 여관 주인과 첫사랑에 빠지고, 수소문 끝에 부유한 귀족 가문에 하인으로 취직도 한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타고난 영민함으로 일처리를 잘한 덕분에, 하인에서 귀족의 비서로 승진해 앞날이 창창해진다. 그러나 소년은 그 순간 또다시 떠날 운명을 느낀다. 그리하여 직장을 버리고 소년은 과감히 짐을 싸서 토리노를 떠난다.

“잘 있어라, 도시여, 왕궁이여. 야망이여, 허영이여, 사랑이여.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온갖 야심찬 모험에 대한 희망이여. 잘 있어라. 이제 나는 탈출구를 찾아서 짐은 가볍지만 환희로 충만한 가슴을 안고 떠나노라. 화려한 계획을 포기한 채 오로지 여행의 행복만 만끽하기 위해 길을 떠나노라!”

이후로 소년의 삶에는 정착이 없었다. 알 수 없는 충동이 소년을 도시 바깥으로 내몰았다. 여행은 습관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는 삶의 자리를 끝없이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정착이 끝나고 또 다른 곳으로 여행하기를 거듭할수록 그의 내면은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넉넉함은 온 인류를 껴안고 깊이는 삶의 심연에 닿았다. 나중에 여행자로서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유랑하는 삶이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바로 루소다. 『여행의 철학』(책세상)에서 읽은 이야기다. 사색의 학문인 철학과 육체의 단련인 여행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제대로 된 사상치고 연구실에서 태어난 것은 거의 없다. 칸트는 매일 세 시간씩 산책하면서 사유를 집약했고, 베케트는 삼십 킬로미터씩 걸으면서 글을 썼으며, 카프카도 휴가 때 일고여덟 시간씩 행군을 즐겼다. 걸으면서 하는 생각만이 세상을 혁명할 수 있다. 지상의 어느 곳에도 고향을 만들지 않는 영원한 이방인만이 대지의 비밀과 마주칠 수 있다.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 없이 어떠한 사상도 태어나지 않는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여문책)에서 “문장은 다리로 쓰는 듯싶다”고 이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사상은 생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리를 육체에 새기는 고행 없는, 진리와 한 몸이 이루려는 실천 없는 사유란, 사탕 바른 혀 놀림에 지나지 않는다. 한 해에 수없이 주고받는 논문들의 운명을 보라. 사각의 검은 관에 담긴 채 마지막에는 거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런데 여행 한 번 안 가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올 여름 여행 계획도 이미 짜 두었다고?

여행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아무도 여행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여행(travel)의 고대 프랑스어인 트라바일(Travail)은 ‘고생’을 뜻한다. 그것도 그냥 고생이 아니다. 신이 여자에게 내린 약속, 즉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고 말했을 때의 고생, 즉 산고를 말한다. 여행이란 자기 안에 타자를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이다. 이는 참기 힘든 고통의 선언이며, 위대한 모성의 선포이기도 하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당신이 ‘여자’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당신의 며칠은 여행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단계로 나눈다. ‘여행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가 가장 밑바닥이다.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만 보는 자’가 두 번째 단계, ‘세상을 관찰해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가 세 번째 단계다. 사실 세 번째 단계까지는 여행을 자처하기 부끄럽다. 마실 구경이나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엔 고생이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는 ‘체험한 것을 자기 속에 데리고 와서 지속해서 가지고 있는 자’다. 진리가 여행자 안에서 부화하는 것, 즉 내면에서 깨달음이 일어서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동화한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행동이나 작품에서 반드시 되살려야 하는 자’다. 여행의 궁극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육체에 새기고 세상에 전파하는 실천을 동반한다. 그래서 집 떠난 부처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후 소를 타고 시장을 향하고, 광야를 떠돌던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되살린 후 곧바로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오뒷세이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서 ‘그 사람’으로 전락한 영웅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향 이타케의 질서(themis)를 회복하고 페넬로페의 정절에 보상하는 이야기다. 마녀 키르케는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카타바시스(Katabasis), 즉 ‘저승여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행이란 낡은 자아를 죽음의 세계에 남겨두고, 새로운 자아를 얻어서 돌아오는 것과 같다. 오뒷세우스가 기어이 저승에 다녀오자, 키르케는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음을 알아채고 이렇게 말한다.

“대담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살아서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번 죽는데 그대들은 두 번 죽는 셈이네요.”

진정한 여행은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 죽는데, 두 번 죽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몸은 반드시 죽는다. 인간의 정의는 필멸(mortal)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말처럼, 인간이 모두 한 번만 죽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인간이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인간을 향해서 거듭나라고 호소했고, 붓다는 인간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되리라고 말했다. 공자는 자기를 극복하면, 삶이 이상적 질서[禮]를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육체는 어쩔 수 없이 단 한 번뿐이라도, 자아는 여러 번 고쳐 쓸 수 있다. 산고를 견딜 만큼 자기 운명을 사랑한다면, 기적은 항상 일어난다. 문학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길가메시도, 오르페우스도, 오뒷세우스도, 아이네이아스도, 단테도, 바리공주도 여행을 통해서 죽음을 겪고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을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을 후회하지 말라.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책하지 말라. 육체에 숨결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인생은 바꿀 수 있다. 여름이다. 그러니, 자, 모두 밖으로 나가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