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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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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박행산전지댁유제(朴杏山全之宅有題, 행산 박전지의 집에서)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 집에서 홍규(洪奎, 1242~1316) 술잔은 항상 채워야 하지만,찻잔은 깊은 것을 쓰지 않는다.행산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자분자분 다시금 마음을 털어놓으세. 朴杏山全之宅有題 酒盞常須滿,茶甌不用深.杏山終日雨,細細更論心. 이 시를 지은 홍규(1242~1316)는 고려 말의 문인으로, 자신의 매부이자 무신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행서와 초서에 뛰어나 글씨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박행산전지(朴杏山全之)는 벗인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의 호와 이름을 같이 적은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호를 지을 때 거주하는 곳의 지명이나 특징을 살려서 짓곤 했는데, 행산(杏山)은 아마도 박전지의 집 근처에 살구나무 숲이..
[시골마을에서 대학을 읽다] 단단혜무타기(斷斷兮無他技, 한결같이 정성스러울 뿐 다른 재주는 없구나) 「진서(秦誓)」에 이르기를, “한 사람 신하가 있어서 한결같이 정성스러울 뿐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너그러워서 [남을] 포용함이 있는 것 같다. 남이 재주가 있으면 자신한테 그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남이 뛰어나고 총명하면 그 마음으로까지 좋아하지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능히 그들을 포용할 수 있으니 이로써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으니 또한 이로움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구나! [다시 한 신하가 있어서] 남이 재주가 있으면 시샘하고 질투하여 그를 미워하고, 남이 뛰어나고 총명하면 이를 어그러뜨리고 [임금과] 통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사람은 포용할 수 없으니 이로써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없으니 도한 위태롭구나!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 無..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홍빈(崔鴻賓)의 서황룡사우화문(書黃龍寺雨花門,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최홍빈(崔鴻賓, ?~?) 늙은 나무는 겨울바람에 울고, 잔물결은 저녁 빛에 출렁이네.오락가락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노라니어느새 눈물이 옷깃을 적셨구나. 書黃龍寺雨花門古樹鳴朔吹,微波漾殘暉.徘徊想前事,不覺淚霑衣. 황룡사(黃龍寺)는 신라 경주에 있었던 절입니다. 고려 중기 몽골의 침입 때 불타 버렸는데, 남은 절터만 보아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화문(雨花門)은 황룡사에 있던 문 이름입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따르면, 이 문은 신라 화랑들이 건립했다는데, 주변 풍광이 황량해서 지나는 이마다 감상에 젖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화(雨花)란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첫 번째로 설법할 때 하늘이 열리면서 꽃이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떨..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임규(任奎)의 강촌야흥(江村夜興, 강마을 밤에 흥이 일어서) 강마을 밤에 흥이 일어서 임규(任奎, 1119~1187) 달빛은 어스름한데 새는 물가로 날고,안개 앉은 강물은 저절로 물결치네.고깃배는 어느 곳에서 잠들려 하는가,아득한 곳에서 한 줄기 뱃노래 소리 들리네. 江村夜興月黑鳥飛渚,煙沈江自波.漁舟何處宿,漠漠一聲歌. 좋은 시는 한 폭 그림과 같은데, 그 안에서 소리조차 들려줍니다.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임규가 지은 이 작품은 좋은 시의 조건에 온전히 부합합니다. 시인은 저녁 어스름에 강가로 나와 있습니다. 해는 저물어 천지가 완연히 어둑해질 무렵입니다. 그믐달인지, 아니면 구름에 가렸는지 달빛조차 오늘따라 흐릿합니다. 새들은 하나둘씩 둥지를 찾아서 강가 모래톱으로 날아갑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물안개가 일어 강 위로 내려앉습니다. 그 사이로 물결이 일렁입니다. ..
[시골마을에서 대학을 읽다] 덕이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德者本也, 財者末也) 『시경』에 이르기를, “은(殷)나라가 아직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았을 때 능히 하늘의 짝이 될 수 있었네. 마땅히 은나라를 살필지어다. 큰 명(命)은 (지키기) 쉽지 않으니.”라고 했다. (이는) 뭇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뭇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는 것이다. 덕이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땅이 있고, 땅이 있으면 재물이 있고, 재물이 있으면 쓰임이 있는 것이다. 덕이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 근본을 멀리하고 말단을 가까이한다면,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음을 베푸는 꼴이다. 이런 이유로 재물을 모으면 백성은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은 모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이 어그러져서 나가면 또한 어그러..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고조기(高兆基, ?~1157)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렸는지시냇물소리 한 자락 베갯머리 서쪽으로 흘렀네.새벽에 뜰 앞의 나무를 쳐다보니잠든 새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았구나. 山莊雨夜 昨夜松堂雨,溪聲一枕西.平明看庭樹,宿鳥未離棲. 맑고 깨끗한 시입니다.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글자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눈으로는 새벽 풍경이 선연히 보이고 귀로는 물소리도 들려오니 저절로 감탄이 돋습니다. 시골의 새벽은 새소리로 가득합니다. 소쩍새, 부엉이 같은 밤새들 울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닭이 울어 젖히고 낮새들이 서둘러 일어나 벌레 잡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려시대 시인 고조기가 맞은 이 새벽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풀벌레조차 울음을 잊은 듯 적막합니다. 그때, 시인은..
[시골마을에서 대학을 읽다] 혈구지도(絜矩之道, 자로 헤아리는 길) 이른바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달려 있다는 말은,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답게 대접하면 백성들이 효심을 일으키고, 윗사람이 웃어른을 웃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공손함을 일으키며, 윗사람이 외로운 이들을 구휼하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니, 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絜矩, 자로 헤아림)의 도를 갖춘다고 하는 것이다. 윗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뒷사람을 이끌지 말고 뒷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왼쪽 사람을 사귀지 말고 왼쪽 사람에게서 싫어했던 바로 오른쪽 사람을 사귀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고 일컫는 것이다. 所謂平天下在治其..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치원(崔致遠)의 가을밤 빗속에서(秋夜雨中) 가을밤 빗속에서 최치원(崔致遠, 857~?) 가을바람에 씁쓸히 읊나니,온 세상에 날 알아줄 이 적구나.창밖에는 밤비가 내리고,등불 앞에는 만리를 떠도는 마음이여! 秋夜雨中秋風惟苦吟,擧世少知音.窓外三更雨,燈前萬里心. 최치원은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鼻祖)에 해당합니다.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으로 태어났기에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뜻을 펼쳐보려고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뉴욕으로 조기 유학을 간 셈입니다. 어려서 이미 천재였던 그는 유학한 지 6년 만이 열여덟 살에 빈공과(賓貢科, 외국인 대상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합니다.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을 받아 관역순관이라는 벼슬을 할 때, 난을 일으킨 황소를 토벌하자는 격문(「토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