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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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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와 저축의 진화 인간은 부(富)와 덕(德)이라는 독특한 형질을 가지고 있다. 여유가 있을 때 자원을 체외에 저장한 후, 나중에 활용하는 행동 전략이 부이고, 자신의 여유 자원을 주변과 나눈 후 나중에 돌려받는 행동 전략이 덕이다. (1-204쪽) ​부와 덕은 약한 수준의 공변성(한 변수가 변하면 다른 변수도 변하는 성질)이 있다. 둘 다 적합도를 높이는 형질이기 때문이다. (1-203쪽) 동물은 대개 덕이 없다. 여유가 있을 때 동종 내 비친족에게 도움을 주고 나중에 그 대가를 돌려받는 ‘시간 지연 상리 공생’ 행위를 동물은 하지 않는다. 동물은 또한 체외 식량 저장 행위, 즉 저축도 대부분 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대개 빈털터리다. (1-204쪽) 진화생태학적으로 볼 때, 부는 적합..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지난달, 풍월당에서 강의했던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 일종의 ‘문학적 꼰대론’을 써 보았습니다. 강의를 위해 반복해서 작품을 읽다 보니, 사르트르가 평생에 걸쳐 싸웠던 삶의 실체, 이른바 부르주아적 삶에 깃든 역거운 허위의식의 실체가 조금은 들여다보이는 듯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중앙선데이》 편집이 바뀌어서 조금 손보았는데, 아래에 전문을 옮겨 둡니다.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40대가 넘으면 ‘경험의 직업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
규탄당한 자로서 살아가기 _『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2017~2013』(루페, 2017)를 보다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2017~2013』(루페, 2017)은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다. 먼저 솔직히 말하자. 사진집을 들여다보면서 내면에서 쏟아지는 구토를 견딜 수 없었다. 아이에카(ayyeka), 즉 ‘너 어디에 있느냐?’는 아담에게 던져진 ‘신의 첫 번째 질문’이다. 배철현 교수에 따르면, 이 질문은 ‘네가 있어야 하는 마땅한 그 자리에 있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섭고 엄중한 질문이다. 김봉규, 김흥구, 신웅재, 윤성희, 이상엽, 정운, 정택용, 채승우, 홍진훤, 최형락 등 열 명의 사진 작가가 참여하고 후지이 다케시가 해설을 한 이 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로 뽑힌 그날로부터 탄핵으로 사라진 그날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편집한 이상엽은 「기억을 소환하기 위한, 사진」에서 이렇게..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세월호 3주기 날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중앙선데이》에 4주마다 한 번씩 쓰는 칼럼. 문학과 슬픔에 대해 다루어 보았습니다.인류 최초의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슬퍼하는 영웅 길가메시로부터, 『일리아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는 영웅 아킬레우스로부터, 「공무도하가」는 백수광부과 그 처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여옥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문학의 기원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날이 풀렸다 싶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앞 냇가를 걷는다. 새벽 첫 빛에 어슴푸레 반짝이는 물살들. 물결이 가볍게 뒤척일 때마다 몸속에서 물이 함께 출렁인다. 푸석한 삶을 견디다 못해 물소..
독고준, 정우, 전혜린, 전태일, 또 다른 삶을 꿈꾸다 《문화일보》 서평. 이번에는 박숙자 선생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2017)를 다루었습니다.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 2012)에 이어서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고준, 정우, 전혜린, 전태일, 또 다른 삶을 꿈꾸다 박숙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2017) 읽으면서 가슴이 찢겼다. 때때로 울컥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고, 늙으신 어머니가 겹쳤다. 평생을 노동으로 자신을 증명했던 아버지는 ‘죽지 않은’ 태일이었고, 공장에서 ‘다행히’ 정년을 한 어머니는 상경하지 않은 영자였다. 달동네에서 자라 문학을 하고, 또 책을 만들며 살았던 나 자신은 이 책에서 다룬 준과 정우와 혜린의 정신적 파편이자 후예였다.준은 『광장』의 독고준이고, 정우는..
[서점의 미래를 찾아서] ‘백년 서점’을 꿈꾸다 《기획회의》에 새 연재를 시작한다. 기존의 글을 단행본으로 마무리하는 작업도 마치지 못한 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는 게 많이 부담스럽지만, 송인서적 부도 이후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을 듣다 보니, 현장에서 또다시 지혜를 얻고 싶어졌다. 현대적 의미의 서점이 등장한 지, 벌써 100년을 훌쩍 넘었다. 방각본 책들을 사고팔던 조선시대 후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서점은 정보화의 거대한 쓰나미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만 보인다.작년에 우리 곁에서 독립서점(기존 서점업계에서는 ‘트렌드서점’이라고 부른다) 열풍이 일어났고, 아직 그 열풍이 진행 중이지만, 이들만으로 ‘서점의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출판 현장에 오랫동안 있었..
[문화일보 서평] 왜 어떤 일은 기억하고 어떤 일은 쉽게 잊을까 _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망각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표절 사건이 일어난 후, 소설가 신경숙이 그 일을 사실상 시인하는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표현의 모호함 탓에 대중의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일상에서 무척 자주 일어난다.1970년 영국에서 유사한 표절사건이 벌어졌다. 고발된 사람은 조지 해리슨. 비틀즈의 멤버다. 그가 솔로로 발표한 곡 「나의 자비로운 신(My Sweet Lord)」이 여성 그룹 치폰스의 히트곡 「그 사람은 너무 멋있어(He’s so fine)」를 표절했다는 것이다. 두 곡은 멜로디가 아주 비슷했다. 「그 사람은 너무 멋있어」를 반주로 틀어놓고 「나의 자비로운 신」을 불러..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 김중혁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중혁의 세 번째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문학과지성사, 2014)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기이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테마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프라이버시의 자발적 유포에 의해 지탱되는 포스트 프라이버시 사회를 향해 무반성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한국 사회의 광적 열풍이 작가들의 예민한 무의식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범죄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범죄의 극적인 해결보다는 포스트프라이버시 사회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탐정물 특유의 지적 재미와 말초적 자극이 약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