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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열정/진화인류학 공부

부(富)와 저축의 진화

인간은 부(富)와 덕(德)이라는 독특한 형질을 가지고 있다. 여유가 있을 때 자원을 체외에 저장한 후, 나중에 활용하는 행동 전략이 부이고, 자신의 여유 자원을 주변과 나눈 후 나중에 돌려받는 행동 전략이 덕이다. (1-204쪽)

부와 덕은 약한 수준의 공변성(한 변수가 변하면 다른 변수도 변하는 성질)이 있다. 둘 다 적합도를 높이는 형질이기 때문이다. (1-203쪽)

동물은 대개 덕이 없다. 여유가 있을 때 동종 내 비친족에게 도움을 주고 나중에 그 대가를 돌려받는 ‘시간 지연 상리 공생’ 행위를 동물은 하지 않는다. 동물은 또한 체외 식량 저장 행위, 즉 저축도 대부분 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대개 빈털터리다. (1-204쪽)

진화생태학적으로 볼 때, 부는 적합도 그 자체다.(1-206쪽) “원칙적으로 모든 동물은 적합도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될 것으로 예상하는 행동만 하므로,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모두 부로 환원”(1-205쪽)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최적 적합도를 위해서는 최적의 아이템을 가져야 한다. 가장 영양가 높은 식량, 가장 먹잇감 많은 영역, 가장 효과적인 사냥 기술 등이다. 진화적 경쟁의 대원칙이다. (1-206쪽)

육식 동물의 부는 사냥 기술과 먹잇감의 가용도를 곱한 것이고, 가용한 먹잇감의 총량은 영역의 넓이에 독점 가능성을 곱한 것이다. 사자는 지배 영역이 넓을수록, 발톱과 이빨이 예리할수록 부자가 된다. (1-205~206쪽)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자는 자연스레 가장 효율성 높은 먹잇감을 택한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남은 음식을 그냥 버려두고, 어슬렁거리다 낮잠이나 자는 것이다. (1-206쪽)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저축이다. 저축 행위로 인해 일부 종에서는 생태학적으로 괴상한 행위가 진화했다. 효율성 낮은 먹잇감을 생산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배가 부른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먹이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이다. 저장이 가능하다면, 먹잇감을 쌓아서 나중에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최적하 자원 생산 전략이라고 한다. (1-207쪽)

최적하 자원 생산 전략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1) 자원 공급량의 등락이 심하고, (2) 자원을 저장할 수 있고, (3) 저장한 자원을 다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명이 길어야 한다. (1-207~208쪽)

때까치는 쥐, 메뚜기, 도마뱀, 물고기 등 먹잇감을 사냥한 후 그 일부를 나뭇가지나 철조망의 날카로운 가시에 걸어두는 먹이꽂이(impaled prey) 행위를 한다. (1-209쪽)

때까치는 먹이꽂이, 즉 저축을 통해 자원 활용도를 높인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사냥하고, 썩 맛있는 먹이가 아니어도 일단 저축해 둔다. 심지어 다른 개체가 방금 사냥한 먹이를 훔쳐 오는 도벽 기생(kleptoparasitism) 행위도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1-210쪽) 이렇게 쌓아 올린 부는 어려운 시기를 견딜 수 있도록 해 준다.

육식성 식량을 저장하는 때까치 사례는 예외적이다. 그러나 식물성 식량을 저장하는 새는 제법 많다. 미국 서부에 서식하는 잣까마귀 중 한 종은 솔씨를 모아서 무려 2500~4000여 곳에 약 3만 개의 씨앗을 파묻는다. 박새과에 속하는 어떤 새는 10만~50만 개의 씨앗을 여러 곳에 저장한다. 가을 내내 모은 식량은 겨울을 나고 봄에 새끼를 키울 때 요긴하게 쓰인다. (1-212쪽)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비축하는 행동을 저장 강박(hoarding)이라고 한다. 상당수 조류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방의 형태로 체내에 자원을 저장하지만, 때까치나 잣까마귀 등 일부 조류 및 인간은 체외에 자원을 저장하는 독특한 행동 형질을 진화시켰다. (1-212쪽)

전 인구의 약 2~5퍼센트는 임상적 수준의 저장 강박 장애를 앓는다. 쓸모없는 물건 혹은 앞으로 필요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은 물건을 무조건 쌓아둔다. (1-212쪽)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저장 강박을 가지고 있다. 재정적 어려움이 예견되면, 사회적으로 외로우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저장 강박이 심해진다. 어린 시절에 결핍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저장 강박을 심하게 보인다. 노인도 그렇다.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떨어지므로 미래를 더 불안해한다. (1-213쪽)

프레퍼(prepper)라고 불리는 생존주의자가 있다. 이들은 비상 식량과 물, 총기, 야전 도구, 캠핑 장비 등을 꾸역꾸역 모은다. 식량 위기, 핵전쟁, 경제 공황, 팬더믹, 심지어 외계인 침공 등에 대비하며 효용 낮은 최적하 자원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계인의 지구 침략은 흔한 일이 아니므로 이들의 행동은 대개 적합도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1-213쪽)

인간의 저장 강박은 농업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물건의 교환은 약 3만 5000년 전, 플라이스토세 최말기부터 그 흔적이 관찰된다. 그러나 화폐를 교환 수단으로 쓰고 물자를 저장하는 독특한 행동 양식은 신석기 혁명 이후에 나타났다. 농사를 통해 얻은 곡식이나 가축은 장기간 저장이 가능했다. 금이나 은은 더욱 안정적 저장 수단이었다. (1-213~214쪽)

몸 밖에 자원을 저장하는 능력은 독특한 인지적 진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과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력이다. 저장 행동의 진화를 위해서는 기억력이 반드시 필요하고, 기억이 있고 환경이 일정한 양상으로 변한다면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1-214쪽)

2007년 캐롤린 래비 등은 캘리포니아어치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며칠 동안 어치에게 두 종류의 상자를 주었다. 하나는 항상 먹이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항상 먹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접시에 먹이를 가득 담아주었다. 캘리포니아어치는 먹이가 없었던 상자에 먹이를 저장하기 시작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급식에는 가끔 사탕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가끔’ 나온다. 아이들은 사탕을 더 달라고 조르지만, 정작 한 개만 먹고 나머지는 서랍 속에 저장한다. 과거의 ‘기억’에 기반하여 앞으로 당분간 급식에 사탕이 나오지 않는다고 ‘예측’하는 것이다. (1-215쪽)

미래 예측은 주변 상황을 보고 논리적으로 연역한 판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천재는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기억 속에 있는 과거를 미래에 투영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1-215쪽)

인류는 이미 차고 넘치는 부를 성취했는데도, 여전히 부의 축적에 매달린다. 우리의 정신 세계 속 미래는 단지 과거의 복제에 불과하다. 전쟁, 기아, 전염병에 시달리던 역사적 기억은 미래에도 그러한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우리 안에 일으킨다. 그리고 불안은 우리가 모으고 또 모으는 강박적 행동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부가 늘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행복하지 않기에 더 열심히 모은다. 때까치는 분명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늘 불안에 시달리는 때까치가 더 많은 먹이꽂이를 소유할 것이다. 체외 자원 축적이라는 독특한 행동 전략은 분명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었지만, 그 대가로 불행을 선물했다. 흥미롭게도 파국적 미래를 준비하는 프레퍼, 생존주의 문화는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가장 발달해 있다. (1-216쪽)

최적하 자원 축적 행동은 과도한 잉여량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가시에 목이 꿰인 동물의 사체는 흉물스럽게 비쩍 말라 썩어 간다. 현대인의 은행 계좌나 주식 계좌, 등기부등본에도 과도한 부가 흉물스럽게 썩어 간다. 그렇다면 쌓아 올리는 행동만 진화하고, 흩어 나누는 행동은 진화하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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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한선, 「모으고 모아도 우리가 늘 불안한 이유」, 《스켑틱》 제30호(바다출판사, 2022).

 

《스켑틱》제30호(바다출판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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