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서평. 이번에는 박숙자 선생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2017)를 다루었습니다.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 2012)에 이어서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고준, 정우, 전혜린, 전태일, 또 다른 삶을 꿈꾸다
읽으면서 가슴이 찢겼다. 때때로 울컥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고, 늙으신 어머니가 겹쳤다. 평생을 노동으로 자신을 증명했던 아버지는 ‘죽지 않은’ 태일이었고, 공장에서 ‘다행히’ 정년을 한 어머니는 상경하지 않은 영자였다. 달동네에서 자라 문학을 하고, 또 책을 만들며 살았던 나 자신은 이 책에서 다룬 준과 정우와 혜린의 정신적 파편이자 후예였다.
준은 『광장』의 독고준이고, 정우는 『환상 수첩』의 주인공이다. 혜린은 전혜린이고, 태일은 전태일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이 땅에서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 역설은, 그들이 살아남지 못한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이들 네 사람이 놓였던 가혹한 현실을 끝없이 환기하고, 생존 대신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공감을 조금씩 누적해, 이들이 느끼고 꿈꾸었던 삶을 후대의 기억으로까지 전이하려는 기획을 품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 기획에 공명하는 내면의 메아리를 들었다.
어쩌면 감격이 있었던 것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저자의 특이한 기술 방법 덕분일 것이다. 최인훈, 김승옥, 전혜린, 전태일 등 작품의 주체들은 이야기의 배후로 완전히 물러서 있다. 다른 모든 작가들도 감추어진 채로 카메오처럼 출연한다. 심지어 작품의 이름조차 철저하게 지워져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한국 현대사를 수놓았던 기라성 같은 작가와 작품을 대부분 만날 수 있지만,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과 같다. 이름이나 제목 등 개별 주체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들이 삭제된 채로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웅적 기원이 지워진 까닭에 이들의 이름은 단지 한 작가나 한 작품에 갇혀 있지 않고 해방되어 이들이 속했던 세대 전체의 경험을 표상하는 선명한 스크린이 된다. 준은 “전쟁을 거치며 국가를 선택해야 했던 전후의 청년”으로, 정우는 “혁명의 시간 속에서 ‘가만히 있어라’라는 명령을 들어야 했던 대학생”으로, 혜린은 “한국적 현실 속에서 기억되지 못한 여성”으로, 태일은 “근대화의 숨은 공신으로 일했던 소년들”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문화사이고, 문학사이며, 생활사이고, 정신사가 된다.
‘생존’이라는 말을 통하지 않고 이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남으라는 현실의 절대적 명령, 즉 젖 먹던 힘까지 다 쓸어 넣어도 굶주림을 면하기 힘들었던 세상의 강력한 압박은, 이들의 도약하는 발목을 붙잡아 버린 단단한 대지이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트라우마를 이루었다. 보라,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
“문리대와 성균관대 사이에 있던 명륜 시장에선 펄펄 끓는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참기름 한 방울과 간장으로 간을 한 ‘엉터리 수제비’를 팔았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 종로 6가엔 동대문극장이 있었는데 ‘꿀꿀이죽’을 팔았다. 단돈 10환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주는데 미군들 잇자국이 난 소시지도 맛있는 먹을거리였다.”
이런 세상에서는 굶어죽지 않는 것, 즉 생존이 삶의 유일한 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념에 따라서 사람이 속절없이 살고 죽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지 않던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독재든 쿠데타든 식모살이든 노예 노동이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련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게걸스럽고 억척스러움이 삶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았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윤리적 아노미가 우선이었다.
준도, 정우도, 혜린도, 태일도, 여기에는 삶이 없다고 생각했다. 감수성 예민했던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는 도무지 살아갈 재주가 없었다. 생존을 이어갈 수는 있었으나 삶을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참히 시간이 흘러가는 와중에 그들은 ‘생존’ 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진 세계의 균형을 찾아 ‘삶’을 회복하고자 끝없이 분투했다. 이때 그들의 길잡이가 된 것이 바로 ‘책’이었다.
그들에게 책은 ‘헤테로토피아’였다.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지만 현실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그 장소였다. 청계천변의 일본 서적으로, 호화 양장본 세계문학전집으로,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로』로, 노동법 해설로, 삼중당문고로, 그들은 빠져들었다. 상상을 놀려 헤엄치고, 가볍게 날아서 존재를 고양시키고, 비참을 피해서 숨고, 이곳이 아니라 저곳으로 옮기고,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싸움을 벌이는 장소였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세상을 보여 주는 신통방통한 세계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독서의 역사는 곧바로 “‘자유 대한’에서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청년들이 꿈꾸었던 세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그들이 상상한 만큼의 역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자기의 한계만큼 나아간 후 그 자리에서 스러졌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남지 못한 자의 자격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국가는 우리를 난민으로 만들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억압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가, 이제 여성들은 주변부로 내몰려 지워지지 않는가, 이제 노동자는 정녕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고 있는가.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다. 마침 세월호가 물 위로 몸을 드러낸 날이다. 물밑에서 끝내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을까.
“들립니까, 들립니까,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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