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책 읽기

(134)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치를까 세상의 게임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유한 게임의 목표는 승리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게임의 목표는 게임의 지속 자체이다. 예를 들면, 입사 시험은 유한 게임이고, 인생 전체는 무한 게임이다. 시험 게임에서는 합격이 최선이지만, 인생 게임에서는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예수는 말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혹여 유한 게임에서 승리해도, 무한 게임을 지속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다. 제임스 카스 뉴욕대 교수는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노상미 옮김, 마인드빌딩, 2021)에서 유한 게임의 아이러니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한 게임은 플레이어, 즉 참가자가 승리하면 게임이 끝나..
차별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올해 편집자들이 가장 사랑한 책 중 하나가 『마이너 필링스』(마티 펴냄)이다. 재미교포 2세인 캐시 박 홍이 쓴 이 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겪는 인종차별 경험과 그로 인해 뒤틀리는 자아에 관한 에세이다. 2020년 미국 출간 직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자서전 형태로 쓰인 이 책에서 저자는 백인 우월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서 느껴온 더러운 기분을 예민한 감각과 섬세한 언어로 그려내서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그 기분을 마이너 필링(minor feeling)라고 부른다. 소수적 감정, 즉 사회적 차별 탓에 소수자가 느끼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이다. 소수자가 이 기분을 느낄 때 다수자는 이를 ‘지나친 예민함’이나 ‘과민반응’ 등으로 폄훼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상처 입은 사람이 ..
층간소음,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 몇 해 전, 위층에 아이 있는 집이 이사했다. 이사 온 날, 좋은 과자를 사 들고 인사 왔다. 아이들이 소란해도 이해해 달라는 뜻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도 아이들 어지간히 뛰는 소리 정도는 배경음 삼을 정도로 무감한 편이라서 찾아온 성의가 고마웠다. 얼마 후, 아이들이 저녁에 너무 열심히 운동했다. 집에 있는 그림책 몇 권을 골라서 올라갔다. 말없이 선물을 내미니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후로도 일은 있었다. 그러나 불편하진 않았다. 선물을 몇 차례 주고받았을 뿐이다. 요즘 층간소음 문제가 갈수록 심각하다.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에 따르면, 관련 상담 건수는 2017년 2만2849건, 2019년 2만6257건으로 늘더니 2020년에는 4만2250건으로 폭증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 등이 늘어난 탓이다..
페미사이드, 여자라서 살해되는 여자들 최근 스물다섯 살 황예진 씨가 남자친구의 폭력 행위로 사망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법원은 가해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경찰은 살인죄 대신 상해치사죄를 적용하려 했다. 이건 현대 국가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흔한 사법적 처리 방식의 하나다. 유족들은 현장 폐쇄회로(CCTV) 화면을 공개하고, 청와대에 청원을 올려 가해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함께 ‘데이트 폭력 가중처벌법’ 제정을 호소 중이다. 그런데 황예진 씨는 예외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남편, 애인 등 친밀한 사이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97명,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이 131명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에서 최소로 잡은 숫자다.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테니, 한국에서 여성 살해 관련 사건은 거..
협력의 인류사 7만 년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지리 기술 제도』(이종인 옮김, 21세기북스, 2021)에서 7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류사 전체를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자연 지리, 인간 기술, 문화 제도의 상호작용이 인류 역사의 핵심 동력이고, 그 방향은 인간 사이의 연결을 증진하는 쪽이었다. 코로나19가 보여 주듯 연결의 부작용이 적지 않았으나, 더 넓은 지역에 사는 이들이 더 많이 협력할수록 빈곤, 질병 등을 해결해 더 큰 번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7만 년 전, 기후 변화를 이기지 못한 몇몇 호모사피엔스 무리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랍 지역에 진출한 순간부터 세계화는 시작되었다. 낯선 포식자, 병원균, 경쟁자와 마주치면서 인류는 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문화의 힘으로 협력을 창..
경기는 왜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운가? 멋진 경기 장면은 뛰어난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선수들은 오직 승리에 몰두하지만, 지켜보는 마음에는 강렬한 미적 경험이 일어난다. 이보다 더 극적인 아름다움이 있을까. 미국의 철학자 한스 굼브레이트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매혹과 열광』(돌베개, 2008)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스포츠는 아레테(arete), 즉 탁월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다. 경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선수들을 지켜보는 것은 “현대의 가장 강력하고 대중적인 미적 체험”이다. 무엇보다 경기는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만족”을 가져다준다. 승부가 벌어지는 순간에는 선수도, 관중도 모두 일상의 이해관계를 망각한 채 전적으로 경기 자체에 매혹된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미의 본질, 즉 무관심성 그 자체다. 이처..
인플레이션이 온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을 포함한 세계 선진국 경제에서 잊힌 말이 있다. 인플레이션이다. 물가는 오르고 돈값은 떨어져 삶의 질이 나날이 나빠지는 상황은 청년 세대의 기억엔 없다. 두 해 전 전세금 1억원이 올해 2억원이 되거나, 어제 달걀 한 판이 오늘 스무 개가 되는 세상에서 평온한 일상은 손쉽게 붕괴한다. 1970년대 말에 한 해 물가가 20~30% 상승하는 세상에서 겪었던 일이다. 그런데 최근 물가 조짐이 이상하다. 농산물 가격, 국제 원자재 가격 등이 오르면서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2.4% 상승해 9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3개월 연속 상승폭이 2%를 넘겼다. 한국만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4월 말 물가상승률도 3.3%에 이르러 12년 만에 최고였다..
치아 격차 : 왜 가난한 사람들의 치아는 왜 더 심하게 썩는가 1980년대부터 대다수 치과의사는 질환 치료보다 미용 시술을 주로 하는 서비스 사업자로 변신했다. 수돗물 불소화, 항생제 등 기술 발달로 치과 환자가 줄면서 치과의사들이 새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1987년 미국 대법원의 의료 광고 허용에 이어서 1990년대 초 의료 신용카드가 발급되자 성형 구매가 폭발했다. 미백, 교정, 보철, 잇몸 성형 등 미용 시술은 이제 치과 진료의 80% 이상에 달하며, 사람들은 예쁘게 웃으려고 빚을 지고 대출금에 허덕이고 신용 불량자가 됐다. 1980년대 이후, 치과 병원이 성형 소비자와 서비스 제공자가 만나는 곳이 되면서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늘어났다. 미국 전체 인구의 3분의 1은 치과 의료보험 혜택이 없다. 보험이 있어도 소용없다. 치과의사 절반은 공공 의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