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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미래에 걸어 맹세하지 마라

네가 내 과거를 망쳐 버려서
미래에 씻어낼 눈물이 한없이 많아.
네가 죽인 부모의 자식들은 살아남아서
마구 보낸 청춘처럼 늙어 가며 탄식하고
네가 죽인 자식들의 부모는 살아서
메마른 고목처럼 늙어 가며 탄식해.
미래에 걸어서 맹세하지 마라.
과거를 망쳤으니 쓰기 전에 망쳤어. 
_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이상섭 옮김(문학과지성사, 2016)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상섭 선생님 번역으로 오랜만에 「리처드 3세」를 읽었다. 

권력 중독의 상징인 리처드 3세는 척추 측만증의 장애를 안고 태어나 두꺼비, 거미 등의 모멸적 별명으로 불리고 더러운, 추악한, 불쾌한 등의 형용사를 평가어로 달고 살아간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채, 피 비린내 나는 장미 전쟁의 와중에 어릴 때부터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란 이 비틀리고 영민한 인물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친족들, 신하들을 살해한다. 

형 조지, 조카 셋, 아내 앤, 귀족인 리버스, 그레이, 본, 헤이스팅스, 버킹엄 등 이 작품에서 살해되는 인물만 10명이다....ㅜㅜ 

위의 대사는 리처드 손에 자식 둘을 잃은 왕비의 항변이다. 권력 탓에 상처를 입은 모든 약자의 항의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리처드는 찾아와서 미래의 행복을 빌미로 또다시 딸마저 내놓으라고 말한다.

과거 아닌 미래에, 지난날의 공적이 아닌,
앞날에 성취할 공적으로 변호하시오.
이 시대의 필요를 역설하시고
대국적으로 사적인 감정을 접으시오. 

그야말로 파렴치하다. 

하지만 이 마키아벨리적 인물한테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있다. 거기, 또한 우리 얼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독백한다.

촛불 색이 퍼렇다. 쥐 죽은 밤이다.
떨리는 살결에 식은 땀이 돋누나.
무엇이 무서운가? 나 자신이? 아무도 없는데.
리처드는 리처드를 사랑한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사랑한다. 

극한 죄책감 속에서도 "내가 나를 사랑한다."라고 외치는 이 매력적 악당을 통해 권력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 보고 싶었다. 

이상섭 선생님의 대단한 위업에는 그저 감탄이 나온다. 

한 외국 문학자가 은퇴 후 10여 년 작업을 통해서 평생 공부하고 가르쳐 온 작가의 전집을 내놓는 건 너무나 눈부신 업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일관된 우리말 어투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판본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정도 단단하고 아름답다.

셰익스피어 작품 제목 전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정성스레 인쇄한 책배가 볼수록 마음에 든다.

ps. 일러두기에 작품 배열 순서에 관한 것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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