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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고 할머니는 세상을 낳았다

폐경은 나이든 여성에게 보편적・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신체적 경험인 난자의 생산 중단이고, 월경의 소멸이며, “번식 수명의 종료”를 말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이다. 동물 중에서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암컷이 장기간 생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비해 인류는 특이하다. 월경의 중단으로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후에도 인간 여성은 길게 삶을 이어간다. 

생물학적 존재 이유를 박탈당한 ‘쓸모없는 시기’가 인간 여성에게만 유독 길게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전자 기계의 고장이 임박한 죽음의 징조가 되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 여성은 왜 긴 노년이라는 특이한 생애사를 갖도록 진화했을까. 

수전 P. 매턴, 『폐경의 역사』, 조미현 옮김(에코리브르, 2020)수전 P. 매턴, 『폐경의 역사』, 조미현 옮김(에코리브르, 2020)


“폐경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독특한 진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폐경의 역사』(에코리브르)에서 수전 P. 매턴 미국 조지아대 역사학과 교수는 폐경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을 통로 삼아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다시 쓴다. 이 책은 폐경을 선사시대(진화), 농경시대(역사), 산업시대(문화)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폐경을 주로 여성의 신체가 고장 나는 것 같은 부정적 경험으로 생각하는 현대 서구 문화의 상식과 달리, 신체 수명과 번식 수명의 어긋남, 즉 할머니의 존재는 인류 진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인간 여성에게 번식 후기 시기가 있기에 인류는 유전자를 퍼뜨려 지구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번식 이후 여성의 존재는 ‘다른 사람과 협동으로 번식하는 능력’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를 ‘할머니 가설’이라고 한다.

할머니들은 채집한 것보다 더 적은 양의 음식을 소비해 잉여를 축적했고, 그 잉여를 딸과 손녀(또는 친척)에게 넘겨 젊은 여성들이 더 자주 출산하도록 돕는다. 이들은 아이 양육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후대에 제공하고, 음식이나 옷감 생산을 위한 도구를 제작하며, 이러한 기술을 아이들에게 직접 전수함으로써 문화・기술 생태계를 형성했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기본형은 ‘할머니’의 존재로 인해 만들어졌다.

농업 혁명 이후에도 할머니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중국, 멕시코, 러시아 등 전 세계 농업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할머니가 농촌 사회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여 준다. 농촌 사회는 기본적으로 토지와 재산 상속이 남성 중심으로 이어지고 마을・사회・국가 등 공적 영역의 권력을 성인 남성이 독점하는 가부장제 사회이다. 그러나 이를 떠받치는 경제의 주인은 번식 후기 여성들이었다. 시어머니나 할머니는 바깥에 있는 남성을 대신해 농장을 경영하면서 가족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특히 소농의 경우, 한 가족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할머니의 존재 유무에 따라 갈린다. 양육 기간에는 잉여 생산 대부분이 아이를 위해 쓰이므로 부의 축적이 어렵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제 몫을 하는 시기에 할머니가 있으면, 가족은 그 잉여를 이용해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데 유리하다. 농업은 여성의 마지막 출산 연령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1700년 전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폐경을 질병의 일종으로 여기는 시선이 ‘갑자기’ 출현한다. 폐경에 따른 증상을 여성 신체의 고장, 즉 죽을 때까지 의료 관리를 받아야 하는 병리적 결핍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에 ‘폐경 증후군’ 같은 질병이 탄생하고, 20세기 이후 에스트로겐 결핍이나 이와 관련된 신체적・정신적 증상이 치료 대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폐경은 거대 의료 산업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나 폐경 증후군은 질병이 아니라 문화적 증후군에 가깝다. 폐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시선이 여성의 몸을 아프게 하거나 과도한 불안에 젖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비서구 사회에서 폐경은 여성에게 특별히 해롭다고 인식되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키욜고으나 한국의 화병 연구가 보여 주듯, “화끈거림, 땀 흘림, 숨 가쁨, 두근거림, 어지럼증 등”과 같은 이 시기 여성 경험은 폐경 관련 질병이 아니다. 화병은 생식력 상실과 관계없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제 억압이 가져온 사회문화적 증후군이다. 심지어 중미 대륙의 마야족이나 모로코 라바트 여성들은 폐경에 해당하는 단어나 폐경 증후군 같은 개념을 아예 모른다. 폐경 현상은 분명히 있지만, 이에 따른 신체 감각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

인류에게는 폐경이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존재는 병든 상태 또는 잉여 생애가 아니라 진화의 주춧돌이었다. 여성은 비생식이 되었기에 비로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번식 이후 생애를 의학적 질환에 가두어 폄하하기보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로 보는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할머니 있는 세상이야말로 인류의 축복이었다. 여성은 젊어서는 아이를 낳고, 할머니가 되어서는 세상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