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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지구사의 지평에서 호모사피엔스 20만 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옥스퍼드 세계사? 영국(서구) 중심주의 서술 아니야?” 역사를 제 입맛대로 농단해 왔던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의심과 회의, 이것이 오늘날 세계사를 대하는 독자들의 일반적이고 정당한 태도이다. ‘도대체 세계사가 가능할까?’ ‘설령 그런 게 있더라도 인종주의(민족주의)에 오염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계사는 가능하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또 인류의 역사가 생명의, 지구의, 우주의 역사라는 거대사의 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짐에 따라, 세계사를 큰 흐름 위에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늘어 가고, 이에 대한 독자들 반응도 뜨겁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 , ,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빅 히스토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등에 대한 열광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 대한 좋은 지도를 갖고 싶다는 독자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발맞추어 국가나 민족을 넘어서 인류의 관점에서 역사학의 성과를 집약하려는 책들도 꾸준하다. ‘문명 교류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써 나가고 있는 하버드-C.H.베크 세계사등이 대표적이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편집한 옥스퍼드 세계사(교유서가, 2020) 역시 인류의 역사를 지구라는 행성의 역사와 한 덩어리로 기술한다. 호모사피엔스 20만 년의 역사를 빙하의 자식들(20만 년 전~12000년 전), 점토와 금속으로(12000년 전~3000년 전), 제국들의 진동(기원전 1000~14세기 중엽), 기후의 반전(14세기 중엽~19세기 초), 대가속(1815~2008) 등 다섯 단계로 나눈 후, 발산과 수렴, 가속적 변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화의 제약, 주도권의 이동이라는 다섯 경로를 줄기 삼아 큰 걸음으로 서술해 나간다.

각 부는 환경과 인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구의 변화는 인류의 역사에 결정적이다. 인간 활동도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만, 지구의 움직임이 인간 활동을 더 크게 제약한다. 만약 빙하기가 지속되었다면, 인류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온난한 기후와 적절한 강우량이 없었다면, 농업혁명은 꿈꿀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을 자기 욕망의 실현에 적합하게 바꾸어 왔지만, 기후지진화산질병 같은 자연의 격동은 늘 문명의 흥망을 좌우했다. 저자들이 흑사병, 인플루엔자 등 전염병의 영향을 선사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루는 이유이다. 흑사병 이후 유럽의 변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전염병의 충격이 있을 때마다 인간의 삶은 크게 요동치고, 역사의 물줄기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빙하 시대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으로 불리는 쇼베 동굴 내부의 벽화.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에서 발견된 이 동굴의 벽에는 약 3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목탄으로 그린 야생마와 들소, 털코뿔소, 사자 등의 그림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1000년 전 지구 전체에 퍼져 나간 700만 명의 조상이 남긴 유산, 즉 친족 관계, 사회적 집단화, 재료 저장, 남성 간 협력, 재배 식물과 가축 등을 바탕 삼아 아직까지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지만, 생활의 기축은 거의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만든 힘은 똑똑한 머리(지능)가 아니라 빙하기 동굴 벽화에 표현되어 있는 마음, 즉 상상력이다. 네안데르탈인 역시 뇌의 용량은 인류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인류는 지능을 상상을 실현하는 데 쓸 줄 알았다. 결정적 차이는 이로부터 나타났다. 머릿속에서 세계를 건설하는 힘, 즉 보이지 않는 존재를 떠올리고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이야말로 주어진 삶의 제약을 탈출해 능동적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존재인 인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상상력 덕분에 인간의 역사는 놀랄 만큼 다양하다.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출발한 인류는 지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환경에 맞추어 농경과 목축으로 나뉜 후, 여기에서 다시 수많은 문화적 분기들을 생성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발산된 세계가 교역, 탐험, 이주, 전쟁 등을 통해서 하나로 수렴되는 흐름이 거세졌다. 세계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옥수수, 감자, 커피, 담배, 설탕, 향신료 등이 지구 전체로 확산됐고, 인간과 동식물과 미생물 등의 이주가 잦아지자 역병의 확산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물론, 세계화는 완전한 수렴이 아니라 또 다른 발산을 낳았다. 가령,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집단 농장에서 여러 뿌리를 융합해서 종교, 음악, 언어 등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인생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인류 역사는 변화의 규모나 속도에서 너무나 압도적이다. ‘가속화인류세’, 인류가 지배하는 지질 시대를 낳았다. 가속에 필요한 에너지 대부분은 빙하기 이래 지속된 지구 온난화가 제공했지만, 인간의 활동도 에너지 사용량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찾는 수렵채집에서 쟁기와 칼을 이용해 토지와 물을 길들이고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작으로 전환한 농업혁명, 16세기 이래 대륙을 넘나들면서 음식 다양성을 늘리고 미개척 토지를 식민화한 생태 혁명, 화석연료와 증기력을 사용하는 산업혁명은 인간의 힘을 비약적으로 늘렸다. 모두가 알듯이, 이것이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환경오염이 일어나며, 자원 고갈이 발생했다.

인간 역량은 어느 때보다 커졌으나, 물질적 풍요가 지혜의 심화와 도덕적 성숙을 동반한 것은 아니다. 가속화에 걸맞은 문화적 제약, 선과 악을 판별하고, 어리석음을 방지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사상(도덕)은 충분하지 않다. 놀랍게도 인류는 다른 종족이나 민족을 같은 인간으로 상상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인간 행동은 차별과 배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념도, 종교도, 과학도 인류 대다수가 욕망을 적절히 조절하도록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부는 더 큰 불평등으로 이어졌고, 과도한 소비는 기후 위기로 되먹임되고 있다. 역사상 인간은 수많은 위기를 기적적으로 넘어섰으나, 현재의 난관에도 무사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대가속으로 더 커진 역량이 더 나은 인간을 낳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인류 간 역사의 큰 흐름을 주도권(권력) 이동으로 설명한다. 군사적 강력함과 경제적 부유함을 갖춘 곳, 즉 제국의 위치는 시간에 따라 꾸준히 달라졌다. 7000년 전에는 농업 혁명이 일어난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쪽이 중심이었고, 기원 무렵엔 동아시아(중국)와 남아시아(인도)로 중심이 이동했으며, 16세기 이후에는 관료제, 상비군,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서양이 주도권을 잡았다. 오늘날 서구의 패권은 퇴조 중이다. 미국의 견제에도 갈수록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다극적 세계가 출현할 조짐도 일고 있다.

원서의 출판이 2019년이다. 클라이브 갬블, 이언 모리스, 데이비드 크리스천 등 각 분야 유명 학자들이 참여한 만큼 이 책은 역사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알차게 담고 있으며, 다른 역사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지도, 사진, 그림, 도표 등이 많아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서양 중심주의와 인종주의에 물든 낡은 역사 교양서를 버리고 지구의 역사라는 한 차원 높은 지평에서 인류를 조망하는 새로운 책으로 갈아탈 때가 되었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편집한  『옥스퍼드 세계사』 (교유서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