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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크노소스에서 비잔티온까지 열한 군데 도시로 본 고대 그리스

폴 카틀리지의 『고대 그리스』(이상덕 옮김, 교유서가, 2019)폴 카틀리지, 『고대 그리스』(이상덕 옮김, 교유서가, 2019)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할 때, 어떤 책을 길잡이로 삼을 것인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다. 기초를 든든히 해두거나 방향을 제대로 잡아두지 못하면, 나중에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느라고 더욱 큰 노력을 들이기 십상인 까닭이다.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입문서들은 오래된 지식만 담고 있어서 별로 흥미롭지 않고, 때로는 한쪽 입장에 치우친 경우도 많아서 선뜻 권하기 힘들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기획한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가 나온 이래, 이러한 고민은 씻은 듯 사라졌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과 입문 수업을 하거나 아이들한테 첫 공부를 권하려 할 때 선뜻 추천하는 도서가 이 시리즈의 한국어 번역판인데, 주로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에서 속해 있다.  

오래전 후배하고 문학 기행을 하나 진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현지에 여행을 먼저 다녀온 다음, 책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후배 말에 따르면, 먼저 책을 기본 골격을 대충 만들어 둔 후, 현지에 가서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자료를 보충하며 느낌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쪽이 낫다고 했다. 곰곰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여러 차례 정독했고, 몇 학기 동안 수업을 하면서 관련 논문들도 모두 챙겼다. 하지만 책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먼저 다양한 단행본들을 읽어서 이 원고를 위한 바탕 작업을 좀 더 폭 넓게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데 첫 번째 길잡이 책으로 당연히 첫 단추 시리즈에 속한 책을 골랐다. 폴 카틀리지의 『고대 그리스』(이상덕 옮김, 교유서가, 2019)다. 이 책은 기원전 1400년 크노소스에서부터 기원후 330년 비잔티온까지 무려 1700년에 걸친 고대 그리스 문명사를 열한 도시의 흥망을 통해서 조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도시, 즉 폴리스(polis)의 문명이다. “문명(civilization)은 공동체(community)를 뜻하는 라틴어 키비타스(civitas)로부터 유래했으며, 도시(city) 역시 이 말에서 유래했다.” 서사시든, 비극이든, 철학이든, 민주정이든 고대 그리스 문명 전체는 약 6미터에 이르는 높은 성벽을 쌓아 도시 안팎을 나눈 폴리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폴리스를 이해하지 않으면,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무려 1000곳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중 저자는 크노소스, 미케나이, 아르코스, 밀레토스, 마살리아, 스파르테, 아테나이, 시라쿠사이, 테바이, 알렉산드리아, 비잔티온을 선택했다. 이 도시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변화를 시기별, 또 특성별로 대표한다. 섬 지역에서는 크노소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미케나이・아르코스・스파르테가, 그리스 중심부에서는 아테나이・테바이가,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서는 밀레토스가, 식민시 중에는 서쪽의 마살리아와 중앙의 시라쿠사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알렉산드리아가,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에서 찬란한 번영을 일구었던 도시로 비잔티온이 다루어졌다. 가히 고대 그리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온 폴리스 전체를 망라한 느낌이다. 

저자는 각 폴리스를 다룬 문헌에 바탕을 두고 유물에 대한 최신 고고학적 성과, 역사적 논의를 망라하면서 각 폴리스가 특정한 역사상 시기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핵심만 추려 가면서 보여 준다. 폴리스들의 역사를 한 도시씩 빠르게 개괄하는 재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같은 시기 여러 폴리스들이 보여 준 차이들을 떠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역사의 실들을 모아서 커다란 옷감을 짜는 기분이다. 고대 그리스 문학이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읽어 두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앞부분에 달린 고대 그리스의 통화와 거리 단위, 뒷부분에 붙은 연표, 인명사전, 용어사전은 이 시기를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깔끔한 지도를 제공한다. 

어쨌든 올해 안에 출판 계약을 맺고 넘기지 못한 원고들을 모두 청산할 생각이다. 에세이 원고는 이미 넘겼고, 출판 편집론은 틈나는 대로 작성 중이다. 아이들을 위한 책 이야기는 연재에 들어갔고, 책의 인문학 역시 자료는 충분히 모았으니 아마도 시간이 쓰게 만들어 줄 것이다. 

#readingbook2020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