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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시민적 휴머니즘의 탄생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임병철 옮김, 길, 2020)한스 바론,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임병철 옮김, 길, 2020)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임병철 옮김, 길, 2020)를 빠르게 읽었다. 재작년 아내와 피렌체를 여행한 이후, 피렌체를 다룬 책들은 어떻게든 한 번쯤 훑어 읽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 이 매력적 도시에 대한 글을 써 보기 위해서다.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시기는 1400년 전후의 피렌체다. 이 시기에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지배자로 끌어올린 코시모 데 메디치 정도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 스승은 이미 세상에 없다. 단테는 1321년에, 페트라르카는 1374년에, 보카치오는 1375년에 죽었다. 출판으로 르네상스를 가져온 알도 마누치오는 1449년에 태어난다. 다빈치는 1452년에,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라파엘로는 1483년에야 등장한다. 1400년 전후는 일종의 공백으로 느껴질 만하지 않은가.

언뜻 보면, 르네상스는 일종의 문학예술 운동으로 보인다. 세 스승과 세 화가의 찬란한 업적이 사람들 눈길을 깊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의 차원에서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정정치에서 근대의 시민정치로 옮겨간 시기이고, 사상의 차원에서 신 중심 세계관이 끝나고 휴머니즘 세계관이 확고해진 시대이다. 언제 이러한 전환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세 스승’과 ‘세 화가’ 사이인 1400년 전후를 주목한다. 세 스승이 르네상스 정신의 맹아를 형성했고, 세 화가는 르네상스의 육체를 이룩했다. 정신이 육체에 안착하는 “거대하고 결정적인 변화”는 둘 사이에 걸친 수십 년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예술에서는 브루넬리스키와 도나텔로, 사상에서는 니콜로 니콜리와 레오나르도 부르니가 활약했던 시기다.

이 시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밀라노와 피렌체, 두 도시 국가의 오랜 전쟁이다. 두 도시는 베네치아와 함께 “1400년경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를 탄생시킨 지역”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기벨린(황제파)에 속한 밀라노는 전형적인 전제국가였고, 구엘프(황제파)에 속한 피렌체는 공화주의 지역 국가였다. 같은 공화주의 지역 국가인 베네치아가 중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피렌체는 팽창하는 밀라노에 맞서서 홀로 이를 무찔러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떠안는다. 두 도시의 대립은, 밀라노 입장에서는 통일 왕국의 건설을 위한 도전이고, 피렌체 입장에서는 도시 독립을 유지하고 시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결사적 응전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1402년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자인 잔갈레아초가 흑사병으로 죽은 우발적 사건이 이탈리아, 더 나아가서는 유럽 문명 전체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비스콘티 가문에 억눌려 있던 수많은 세력들이 봉기하는 계기이면서, 동시에 이전 수십 년 동안 밀라노에 맞서 전쟁을 치러온 피렌체의 힘이 확대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힘겹고 어려운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피렌체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시 국가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데 필요한 인간적 자부심과 믿음, 즉 ‘시민적 휴머니즘’이라는 윤리적・정치적 사유 양식을 창출했다. 이 양식이 서서히 확대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민적 삶의 르네상스, 즉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세 스승의 휴머니즘이 그리스・로마 공부를 통해 인간 정신의 고양에 집중하는 일종의 문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 시기 피렌체에서 실현된 시민적 휴머니즘은 “모든 전제주의에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시민 자유를 옹호”하는 공화주의 정치 운동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이전 세대의 휴머니즘과 달리 시민적 휴머니즘에서는 “학문과 명상의 세계로의 ‘이기적’ 회피에 대한 활동적 삶의 우월성, 건전한 사회의 토대로서 가족에 대한 예찬, 완전한 삶이란 현자의 삶이라기보다 자신의 학문 이외에도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고 공직에서 동료 시민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시민으로서의 삶”이 강조된다. 

새로운 삶의 양식이 공동체에 정착되려면, 시민들 전체가 자발적으로 자기 혁신을 위한 대규모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 사상은 위기의 시체를 파먹고 자란다. 예술 역시 자유의 피를 마시며 성장한다. 저자는 말한다. “한두 세대 전에 아르노 강변의 이 도시로 수입된 휴머니즘이 이 위대한 사건의 용광로에서 시민적 세계와 융합했다.” 밀라노의 전제 정치에 맞선 피렌체 시민의 투쟁 과정에서 ‘시민적 휴머니즘’이 육체를 얻고 현실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다.

니콜리, 부르니 등 시민적 휴머니스트는 로마 공화정을 높게 평가하는 등 피렌체 역사 전체를 공화의 관점에서 다시 쓰고, 내면의 수양에 천착했던 ‘세 스승의 세대’와 결별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공적 헌신을 통한 자기 완성을 강조하는 시민 윤리를 세웠다. 그리스・로마의 문헌에 담긴 시민적 삶의 원리들이 천 년을 건너뛰어 피렌체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밀라노와 피렌체의 투쟁은 더 이상 ‘황제 대 교황’이라는 중세적 허울을 쓰지 않았다. ‘전제 대 공화’라는 현실적 정치의식이 점차 선명해졌다. 피렌체 시민들은 스스로를 공화의 표상으로 여겼다. 피렌체 독립을 위한 그들의 “열정과 의지”는 밀라노의 전제주의적 억압에 맞서 “시민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추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정치가 드디어 신적 질서를 벗어나 세속화되었고, 근대 서양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이념인 공화주의의 현실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 책은 주로 문화예술의 차원에서 다루어진 르네상스를 정치사상의 변혁과 연결한다. 피렌체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민적 휴머니즘’을 근대의 정치질서로 이어지는 열쇠로 보는 것이다. 63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에는 ‘세 스승’ 이후의 사상적 움직임에 대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세부들이 넘쳐난다. 나중에 시간을 두고 정독해야겠다. 

#readingbook202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