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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올림픽의 인문학 ― 경기, 인류 문명의 위대한 도약


매주 쓰는 《매일경제》 칼럼,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이해 그 의미를 따져 보았습니다. 아래에 조금 보충해서 올려 둡니다. 


올림픽의 인문학 ― 경기, 인류 문명의 위대한 도약





올림피아 축제란 무엇인가. 전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의 승리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한 후 탈진해 죽은 병사를 기념하는 데에서 이 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 축제는 간절한 기다림 끝에 결국 제우스의 정의가 실현됐다는 기쁨의 선언이자 평화의 선포다. 또 앞날에 대한 불안도, 방패에 실려 돌아온 이들로 인한 슬픔도 없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한 재현이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것은 무척이나 어울린다. 고구려 땅일 때 평창(平昌)은 욱오(郁烏)나 우오(于烏)로 불렸고 통일신라 때에는 백오(白烏)라는 이름이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최전선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받은 군사 요충지다. 고구려가 ‘태양의 새’인 까마귀의 이름을 주어 기념하고, 신라는 화평한 세상의 도래를 상징하는 ‘흰 까마귀’의 이름을 붙여 그 뜻을 이었으니 아득한 옛일이지만 까닭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초에 드디어 지금의 평창이 되었다. 평(平)에는 천하가 평화롭고 만물이 안녕한 시절이 오기를 원하는 뜻이 있고, 창(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동체가 융성하기를 바라는 절실한 생각이 담겨 있다. 올림픽 정신과 통한다. 정치적,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는 한반도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소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고대 희랍의 올림피아 축제는 아르곤(Argon·경기)들의 축제였다. 달리기, 활쏘기, 던지기 등 육체 능력만을 겨룬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시가, 비극, 연설 등 모든 분야의 경연이 열렸다. 아르곤은 본래 ‘경쟁 장소’를 가리켰는데, 나중에는 ‘경쟁 자체’를 지칭했다.  ‘비극의 수사학’이라고도 불리는 아르곤은 비극에서 법정 논쟁 장면에 주로 쓰이면서 ‘변론’ 또는 ‘논쟁’이라는 뜻을 얻었다. 요컨대 아르곤은 시민 개개인의 동등성에 바탕을 둔 채 시민들이 자기 능력을 모조리 표현하는 실천의 형식이었다. 

희랍인들이 올림피아 축제에서 아르곤들을 겨룬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보존을 위한 강렬한 투쟁, 즉 이기적 유전자의 작동은 모든 생명의 근본 활동이다. 생명 현상은 잔혹하고 무자비하다. 지느러미를 팔다리로 바꾸어 지상으로 진출하든, 허파를 유지한 채 바다로 되돌아가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자신의 잠재를 온전히 끌어내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도태된다. 자연환경에서 살아남는 자는 반드시 강하다. 경쟁에서 기회를 잃은 약자는 목숨을 잃고 사라질 뿐이다.

아르곤(경기)의 탄생은 자연의 이러한 한계를 넘어 문명의 도약을 가져온 인류사적 사건이다. 희랍인들은 자연의 생생한 야만성에 내재한 활력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즉 승자가 명예를 독차지하면서도 패자가 이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을 발명했다. 경기에서 패자는 승자의 비법을 연구해 자신의 역능을 끌어냄으로써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승자는 패자의 도전을 물리치려 더욱더 노력하여 새로운 역능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경기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승자의 머리에 올리브 가지를 얹어 영예를 주되 패자를 모욕하여 원한을 품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패배가 두렵지 않은 자유 경쟁 속에서 희랍인들은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승리를 통해 인간의 극한을 드러내고, 패배를 통해 자신을 비약할 줄 문명이 어찌 눈부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대 희랍의 모든 위대한 유산은 아르곤으로부터 나왔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아름답게 연출하는 선수들의 아르곤을 만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