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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파르헤시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매주 쓰는 《매일경제》 칼럼, 이번에는 서지현 검사의 일을 계기로 파르헤시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 써 보았습니다. 



파르헤시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오이디푸스, 그대가 왕이지만 답변할 권리만은 우리 두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할 것이오.” 

테이레시아스가 말한다. 테바이를 덮친 전염병의 진실을 말하러 찾아온 예언자를, 성난 군주는 뇌물을 받아먹고 지껄이는 헛소리로 몰아붙인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자기가 오이디푸스의 노예가 아니라면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장면이다.

파르헤시아(Parrhesia). 

희랍어로 ‘진실을 모두 말하기’라는 뜻이다. 성서에서는 ‘담대함’으로 옮긴다. 테이레시아스 같은 태도를 말한다. 정치적 권력의 크기나 사회적 처지 등과 상관없이 마음속에 있는 의견을 남김없이 털어놓는 태도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파르헤시아’는 희랍 민주정치의 작동 원리이자 시민들의 윤리적 의무였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 등의 저작을 통해 주체 또는 앎이란 권력의 효과라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그렇다면 권력의 그물망이 갈수록 촘촘해지고, 주체를 완전히 옭아매는 상황에서 어떻게 권력의 바깥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비판적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말년의 푸코를 사로잡은 고민이었다. 위반을 행할 줄 아는 정치적 영성을 배양하는 것, ‘파르헤시아’를 살아갈 줄 아는 힘을 배양하는 것, 비판적 주체의 계보를 통해서 그 가능성의 조건을 따져 보는 것이 푸코의 마지막 탐구였다. 

진실을 말하는 데에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을 기꺼이 발언하고, 이러한 ‘공공연한 말하기’를 통해 진실 게임을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상대의 진실에 맞서 쟁론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희랍에서는 그 과정을 논변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논변이 매끄러운 적은 없었다. 상대가 권력자인 경우 역풍이 있기 쉬웠다. 『일리아스』에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불러온 비극도 청년 아킬레우스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힘자랑에서 비롯하지 않았는가.

고금의 권력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문제를 일으키는 자,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규탄하면서 ‘비정상’으로 만든다. 골칫덩어리, 부적응자, 미친× 등의 표지를 붙임으로써 진실의 폭로자를 절망에 빠뜨린다.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범죄자가 되고, 또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심지어 권력은 사후까지 파고든다. 무도한 연산군은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스승 김종직의 무덤까지 파헤쳐 시신의 목을 베지 않았던가. 이것이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푸코는 진실을 둘러싼 게임이 ‘분노와 관용, 아첨과 파르헤시아’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강자가 관용을 베풀 때에는 파르헤시아가 활발해진다. 반대로 강자가 분노를 쏟아낼 때에는 아첨이 넘쳐난다. 만약에 어떤 조직이 분노와 아첨을 진실 게임의 규칙으로 삼고 있다면 진실이 아니라 거짓과 침묵이,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이 그 조직을 먹어치운다. ‘무사유’를 ‘사유’로 여기는 아첨꾼이 번성하면서 아무리 이상한 일이라도 기어이 이해해 버리는 신공을 발휘한다. 

서지현 검사의 파르헤시아를 통해 검찰 조직의 반여성적, 비민주적 성격이 확연해졌다. 이 행위에 분노를 쏟아낼지, 관용을 베풀지는 전적으로 검찰의 강자들에게 달려 있다. 이 기회에 그동안의 불관용을 청산하고, 관용과 파르헤시아의 조직으로 환골탈태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