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우리 모두가 기억할 만한 두 죽음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 사람은 사고였고, 한 사람은 과로였다.
한 사람은 두 달 전 태안화력발전소의 빛도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작업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몸이 두 동강 난 채, 무참히 죽었다. 이름은 김용균, 입사 석 달째, 고작 스물네 살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일 뻔했다.
일터의 안전을 확보할 절차를 마련하고 관련 비용을 들이는 대신, 발전소 경영진이 ‘위험의 외주화’를 고안하고 집행한 것은 사실상 사고를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 그 비틀린 인간성을 규탄해야 마땅하다. 젊은 영혼의 안식을 담보 삼아, 유족들은 ‘죽음의 외주화’를 막는 사회적 합의를 일으켰다. 숙연히 마지막 가는 길을 기릴 만하다.
한 사람은 명절 하루 전, 국립중앙의료원 안에 위치한 사무실 의자에 앉은 채 돌연 숨을 거두었다.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름은 윤한덕, 나이는 쉰한 살이었다. 평생 응급의료에 헌신했지만, 정작 자신은 응급이 필요한 순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상태에서 어이없이 스러졌다. 국내 최고의 응급의료 시설을 갖춘 곳 중 하나였는데도 말이다.
과로란 무엇인가. 시간 안에 처리할 일이 넘쳐나는데도 오랫동안 사람이나 자원이 추가로 투입되지 않은 탓에, 생체의 리듬이 교란되고 육체의 회복탄력성이 파괴된 상태를 말한다. 남들은 이해 못 할 소명 때문에 명절 전날 회식 후 홀로 사무실로 돌아간 사람만이 이런 죽음을 맞는다. 일터에 헌신할수록 죽기 쉬운 상태를 조장했으니, 과로 역시 당연히 직장이 책임질 사고에 해당한다. 고인의 헌신에 고개를 숙이면서, 과로 없는 일터를 이룩할 의무를 책임자의 양심에 지우고 싶다.
죽으려고 일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아갈 밥을 벌려고 직장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일터에서 목숨을 잃지 않을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에 속한다. 자칫, 삶의 현장이 죽음의 막장이 되니까 말이다. 두 사람의 죽음은 정녕 ‘인간답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쓸쓸히, 외로이, 어이없이, 죽음을 맞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죽을 권리』에서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말한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내포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이를 포기할 때가 많은 편이지만, 사실 이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다.” ‘인간다운 죽음’은 ‘인간다운 삶’의 전제조건이다. 죽음을 존엄하게 만들 수 없는 사회는 삶도 존엄하게 만들 수 없다. 일터에서 사고로, 과로로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인간다운 사회’가 아니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포스코에서는 사고로 의심되는 한 노동자의 죽음이 있었고, 인천 가천대 길병원 당직실에서는 35시간 동안 연속 근무하던 전공의의 죽음이 있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두 사람과 비슷한 죽음이 얼마나 잦은지를 모두 알고 있다.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죽음은 무게가 완전히 똑같다.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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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연재 칼럼 ‘책과 미래’, 이번 주에는 김용균, 윤한덕 두 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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