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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이웃이란 옆집에 산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만들어진다


이웃이란 옆집에 산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만들어진다

테리 이글턴의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 윤리학 연구』(김준환 옮김, 도서출판 길, 2018)을 읽다



이글턴의 새 책이 나왔다.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 윤리학 연구』, 김준환 옮김(도서출판 길, 2018). 오후부터 읽기 시작, 손에서 놓지 못하고, 저녁식사 때 잠깐 쉰 후, 지금껏 내리 읽었다. 라캉의 삼분법(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기대어, 인류의 윤리적 사유를 절개하고 접합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상가들 중 흥미로운 몇 명이 아직 남았지만, 일단 한겨레 기사 눈팅~~~^^;;; 최원형 기자의 핵심 정리. 


이글턴은 ‘자신의 욕망을 고수하라’는 라캉의 표어에 일부 수긍하면서도, “윤리는 욕망이 아닌 사랑에 대한 것”이라며 ‘욕망’을 ‘사랑’으로 바꿀 가능성을 찾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랑은, 당연히도 에로스가 아니라 “타자성을 지닌 이웃”에 대한 비인격적 사랑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종교는 주체와 대타자 사이의 비극적 균열을 극복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각자의 성취가 모두의 성취를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실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윤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윤리는 정치와 구분되지 않으며, 윤리를 구현하지 못하는 정치 체제와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실천적 주제가 된다.(최원형, 「‘정치적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글턴의 윤리학」 중에서) 


서문에서 이글턴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종교는 인류역사상 가장 유해한 제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종교가 만들어 내는 “급진적 신학”은 “정치적 함의에서 아주 세속적인 좌파 사상보다 더 혁명적”이다. 요컨대, 이글턴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는, 그리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룩하는 일이 되는 세계를 상상한다. ‘정치적 영성’의 문제, 말년의 푸코가 고민했던 그 문제다. 

데이비드 흄, 프랜시스 허치슨, 에드먼드 버크, 애덤 스미스 등의 상상계 윤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가들, 스피노자, 칸트 등 상징계 윤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상가들, 그리고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로부터 시작해 레비나스, 데리다, 바디우 등 실재계 윤리학으로 나눌 수 있는 사상가들을 두루 편력한 후[각주:1] 결론부에서 이글턴은 말한다.


결정적인 사랑의 행위란 서로의 영혼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가스실로 들어서는 줄에 서 있는 어느 낯선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기는 하지만, 어느 낯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은 궁극적인 윤리적 ‘사건’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죽음을 신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런 이유에서 신은 사랑과 공포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이 바로 성스러운 공포인 것이다.

 

신, 즉 초월성의 존재(상징계의 질서)는 개체가 자신의 쾌락(생존)에 매몰되는 것(상상계)을 낯설게 만들고, 심지어 파괴한다. 신은 쾌락이자 공포다. 신이 있기에 우리는 비인간적 상황에 처한 낯선 사람을 기꺼이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다. “이웃 사이란 지역성이라기보다는 실천이다.” 이웃이란 옆집에 산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보증하면서도 신이라는 추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필멸’(유한성)하는 우리의 육체다.


살과 피란 영도(degree zero)의 인간으로서 가공하리만큼 익명성을 띠면서 동시에 매우 소중한 접촉의 매개이기도 하다. 필멸의 고난에 처한 육체가 모든 문화의 근저에 있기 때문에, 지역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 


타자를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가진 동일한 존재로서, 즉 필멸의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 동질성에 기대어 신의 사랑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글턴이 말하는 윤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닮기’, 즉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고, “어느 타자이든 타자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숭고한 부조리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의를 추구하다가 국가에 의해 살해당할 준비가 되는” “모진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실천 속에서 윤리적 실재계와 정치적 상징계는 하나로 뒤섞인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유한한 육체가 느끼는 욕망을 충족(상상)하는 동시에 정언명령으로 선포되는 보편법(상징)에 어긋나지 않고 살아가는 주체(실재), 즉 정치적 영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활약한 ‘축의 시대’에 이미 답의 윤곽을 찾아내고도 끝내 구현하지 못한 인류의 오래된 문제이자, 오늘날에도 문학의 심연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명민한 비평가인 이글턴의 안내를 받아 이 세계를 탐구하는 행복을 만끽한 토요일이다. 즐거운 하루였다. 새 학기에 문학비평을 함께 공부할 학생들과 이 문제를 좀 더 깊게 탐구하고 싶다.



  1. 사실, 이 부분이 무척 재미있고 훌륭하지만.... 요약은 위의 기사에 잘 되어 있고, 따로 정리하자니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여 정식 서평이 아니니 일단 미뤄 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