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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복종하는 신체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




새해 벽두에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김현정 옮김, 더숲, 2018)를 읽었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로서 살지 못하고, 권위에 굴복해 자신을 상실하고, 나아가 타자를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는가를 심리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고민했던 ‘악의 평범성’ 문제, 즉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하수인이 되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는 문제를 잊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 주체로서 행동하고 약자와 공감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수십 년 동안 여러 사람이 과제를 이어받으면서 끈질기게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학자인 저자에 따르면, 우리 문화는 “근본적으로 복종을 권하고 있다.” 아이는 “자신의 충동을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쾌락을 따르려고” 하는 존재로, “지저분하고, 더럽고, 욕심이 많고, 변덕스러우며, 다 때려 부수려고 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하나의 전투”(히틀러)로 상정되며,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좇아 “아이들의 쾌락 추구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 충동을 저지하는 것이 우리 문명이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로 여긴다. “아이가 자기만의 시도나 노력을 하게끔 내버려두면 그 아이는 사회에서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이러한 생각이 바로 아이에 대한 억압을 가져온다.

“아직 언어와 사고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인 아동기에 사람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억압적인 힘”에 눌려서 “다른 사람의 의지에 굴복하는” 복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타인이 바라는 것을 미리 찾아내 “자발적으로” 타인의 힘과 권위를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자신을 공격자와 전적으로 동일화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프리드요프 셰퍼는 이를 “병적 충성”이라고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깊이 뿌리박힌 하인 근성” 탓에 사람들은 실제로는 복종하는 주제에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부모의, 사회의, 국가의 폭력에 굴복한 끝에 ‘자유롭게’ 복종을 행하면서 살아간다. 문제는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밖에 없”으며, “분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데 나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폴란드에서 ‘궁극적 해결’(유대인 학살의 나치식 표현)에 나선 독일 군인들의 기저심리였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의 의지를 집행하기만 하는 타율 상태에 빠진다. 이때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복종의 문화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고, 음식이 썩어가는 풍요 속에서 굶주려 죽은 이들이 속출하는 사회를 낳는다. 저자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자유의 감정”을 느끼는, “타인을 지배하고 비방함으로써 자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는 극심한 자기소외다. 복종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오히려 낯설게 느끼고, “나를 내 안의 타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극우주의 움직임 뒤에는 열등감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 원동력은 사상이 아니라, 바로 열등감이다. 사람들이 복종하는 이유는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을 향한 증오는 복종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정체성을 향한 증오다.” 자신을 증오하고 타자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며, 그 결과로 타자마저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대 문화의 본질이다.

이 책은 아주 소품이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읽어가면서 끝없이 자신의 내적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이미 ‘복종하는 자아’를 가져버린 사람은 이 폐쇄병동을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저자의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한없이 깊은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뿐이다.” 부모와 아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지만, “‘아이의 행복’을 위해 부모가 참고 견딤으로써 갈등이 해소”되며, “갓난아기의 욕구와 이를 인지하는 어머니의 능력이 상호작용할 때” 얻을 수 있는 “기본적 신뢰”를 통해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죄책감 없이 발달할 수 있으며, 나중에 어머니 품을 떠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복종과 싸우는 힘인 공감과 사랑은 이러한 자율성으로부터 나온다. 공감을 통해 인간은 “복종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뿐만 아니라 복종을 물리칠 수도 있다.” 

이탈리아 정부의 난민 정책에 극우적 광풍이 몰아칠 때, 남부에 있는 리아체라는 마을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불법이주자들을 기꺼이 받아 주었다. 그 결과 “사회 질서의 붕괴도 일어나지 않”고, “마을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죽어가는 마을이 회생”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야말로 복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다. 독재가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의 연대다.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