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54호 특집 “‘한 학기 한 권 읽기’에 대비하라”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해 출판 시장에 가장 핫 이슈 중 하나가 학교에서 실시되는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의미를 짚어 보고, 편집자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아래에 공유합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와 출판 편집자의 할 일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10년 동안 책 전체를 읽으면서 수업하는 것으로, 2018년부터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수업에서 책을 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어 등 많은 교과서에는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을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각 분야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책에서 발췌한 글들이 상당수 실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발췌문을 중심으로 한 독해에 중점을 두었을 뿐, 책 전체를 수업한 적은 없었다. 수업과 관계없이 학생들에게 따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게 했을 뿐이다. 몇몇 선생님들이 독서 수업을 따로 열어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만들어 갔지만, 공교육 안에서 독서가 수업 안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독서수업과 국어수업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국어수업이 주로 글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확인하는 ‘문해력 측정’이 중심이라면, ‘한 학기 한 권 읽기’ 같은 독서수업은 ‘선생과 제자가 함께 읽고 배우면서 작품의 의미를 자기 인생으로 가져오는 수업’으로 진행해야 한다.
본래 독서는 “관객이 연주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다른 사람이 표현하는 것을 감상하는 미술이나 음악이나 영화와 달리, 독서는 기록된 문자의 빈틈을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 등으로 채워 가면서 수행해야 하는 전뇌적(全腦的) 활동이다. “머나먼 곳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라는 문장을 읽고 학생들한테 이를 그림으로 옮기게 하면, 똑같은 그림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독서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과정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재구축하는 끝없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경제학이나 물리학 같은 주로 정보를 다루는 과학과는 달리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억지 정답을 추출하는 것은 별무소용일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책이나 신문 같은 인쇄미디어뿐만 아니라 화면이나 소리로 이루어진 다양한 미디어에 둘러싸여 다양한 종류의 글을 읽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국어 교육이 미디어 문해력 중심으로 이행하는 것을 불가피하다. 국어로 문학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글을 모두 다루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책 읽기와 화면 읽기는 다른 종류의 읽기이고, 긴 글 읽기와 짧은 글 읽기도 같은 읽기가 아니다.
영화나 공연을 볼 때처럼 화면 읽기는 이미지 중심으로 숙고보다 반응을 우선적으로 요구한다. 페이스북에서 바라는 것은 ‘좋아요’나 ‘공유하기’ 같은 반응이지 일정한 시간을 들여서 사유한 결과를 기술해야 하는 댓글은 아닌 듯하다.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나 유튜브 같은 이미지나 동영상 중심의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면 이러한 화면 읽기의 본질은 더욱 분명해진다. 종이 읽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읽기를 촉발한다. 종이에서 읽은 것에 대한 반응은 오로지 말이나 글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다. 대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유를 거치지 않은 반응은 거의 불가능하다. 종이 읽기는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사유를 연습하는 단련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발췌한 글이나 짧은 기사 등을 읽는 것과 일정한 길이 이상을 갖출 수밖에 없는 책을 읽는 것 사이에도 아주 다른 차이가 있다. 짧은 글은 구조에 대한 사유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목이나 소제목, 각주나 면주 등을 고려할 필요도 없고, 하나의 사유를 정립하는 데 반드시 수반되는 온갖 반론과 비판을 함께 읽지 않고도 글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정한 길이를 필요로 하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조를 함께 고려하는 ‘깊이 읽기’가 필요하다. ‘깊이 읽기’는 책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구조, 가령 기승전결 같은 의미 구조를 자신의 온 경험과 사유를 동원해서 재구성하는 능력이 없으면 수행할 수 없다. 깊이 읽기는 반드시 저자가 부여한 의미의 확인이 아니라 의미의 적극적 재구축, 즉 생성을 요청한다. 책을 읽는 일은 단순한 문해력을 넘어선다. 책은 읽을 때마다 다시 읽는 것이고, 또 새로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바로 사유다. 사유는 책 없이 불가능하며, 반드시 책을 닮은 방식으로만 행할 수 있다.
책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인간은 사유했겠지만, 그 사유는 이미지 중심의, 즉 유비로 가득한 사유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같은 것을 보면 분명하다. 책이 존재한 다음, 인류의 사유는 비약적으로 달라졌다. 일찍이 마셜 매클루언은 이를 ‘활자인간’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지만 책 읽는 인간만이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니콜라스 카는 “문자가 곧 사유이며, 책은 깊이 있는 사유를 제공하는 유일한 미디어”라고 주장한다. 책을 읽지 않아도 공부하는 교육은 결국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뒤늦게나마 ‘한 학기 한 권 읽기’ 같은 교육이 실시되어, 교육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을 배양하기로 한 것은 인공지능시대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의를 차치하고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학기마다 교과서가 아닌 책을 수업시간에 완독”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의 독서습관 형성 및 독서문화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며, 어린이 및 청소년 서적 판매가 늘어나는 등 출판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이 수업은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누고 자기 생각을 쓰는 일”에 중심을 두는 “통합 수업 활동을 개발”하도록 되어 있어서, ‘말하기나 쓰기’ 등 자신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것들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활동이 크게 증진되리라 기대된다.
또한 문해력과 같은 객관적 측정 지표가 제시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 “쓰기의 자신감” “재미나 감동을 느낌”과 같은 “주관적 태도”를 함양하는 것이 수업의 주된 목표다. 따라서 수업을 대하는 학생들 역시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감할 수 있다. 교사든 학생이든 수업 사전 사후 활동 역시 ‘가정된 정답’을 찾는 일이 중요했던 그동안의 교육과정과는 달리, 다양성과 창조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그 획기적 성격 탓에 현장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높은 편이다. 교사나 학생이 충분히 준비 과정 없이 이 수업에 접근할 때, 자칫하면 충분한 토론이나 발표를 통한 의견 교환 없이 기계적으로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과 같은 형식적 수업이 되어 버릴 가능성도 크다. 물론 이러한 수업이 되지 않도록 충분한 사례들이 제공되기는 하겠지만, 입시 중심의 현행 교육 시스템을 생각할 때 보충수업 시간으로 전락할 걱정도 아주 많다. 하지만 이 수업의 성공은 인접 교과로 확산되면서, 결국에는 해외 선진국들처럼 ‘교과서 없는 수업’을 촉진하고 책 읽는 인간을 양성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에 출판계에서는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게 적극적인 출판 활동을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관련한 책들을 펴내는 편집자와 교사들, 연구자들, 교육활동가들이 자주 만나면서 이 수업에 필요한 책들을 논의하고 협업하는 공적 구조를 우선해서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 모임에서는 정기적으로 수업과정을 설계하고 우수 사례를 공유하며 개선 방안을 모색하면서 필요한 책들을 확인하는 일을 하면 좋을 것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책 읽는 수업에서 활용할 만한 다양한 책들이 개발되어 교사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야 하며, 기존에 출판된 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수업에 쓰기에 적절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므로 수업용으로 개정하여 적절한 형태로 제공되어야 한다. 최근에 초등학교 저학년 읽기 수업에 쓸 수 있도록 빅북(Big Book)을 제작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책들은 주로 교사들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읽어주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1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반드시 책을 한 권만 읽으라는 뜻은 아니므로, 역량이 있는 출판사라면 학년과 학생 수준에 맞춰 다양한 책들을 체계 있게 제공하는 시리즈물 기획에 나서야 한다. 수업은 아무래도 연속성이 있어야 하고, 학교에 속해 있는 다양한 학생들을 만족시켜야 하므로, 단행본보다 시리즈물 쪽이 유리해 보인다. 한편,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그림책이나 읽기책은, 내용은 훌륭할 수 있어도, 교실에서는 무작정 읽으라고 권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단어 수준, 문장 길이, 주변 교과와 연계 등 고려할 사항이 많으므로, 교육 전문가와 협업과정을 거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수업에 적합하도록 세심하게 재편집할 필요가 있다. 2
시리즈물은 몇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듯하다.
우선, 학년별(나이별) 눈높이에 맞추어 학생들 관심사가 다양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한 학년에 50~100권 정도 이야기책을 개발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대 출판부의 리딩 트리 시리즈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아울러 일단 학생들이 설정에 익숙해진 후에는 뇌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내용의 재미와 의미에만 집중할 수 있는 캐릭터 시리즈물도 권장할 만하다. 국내에 출판된 스콜래스틱 출판사의 『마법의 시간여행』(비룡소)을 참고할 수 있겠다.
고전 같은 경우에는, 같은 내용의 작품을 나이나 수준에 맞도록 다시 쓴 작품들을 한 출판사에서 연속적으로 제공하는 ‘사다리물’의 개발도 시급하다. 가령, 그림책으로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등을, 저학년용으로는 ‘우리나라 옛이야기’ 등을, 고학년용으로는 ‘어린이 삼국유사’ 등을, 중학생용으로는 ‘청소년 고전 삼국유사’를, 고등학생용으로는 ‘현대어로 풀어 쓴 삼국유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역사, 철학, 과학, 지리, 인물, 사회, 직업 등을 학년에 맞추어 연속 체험할 수 있도록 성장물 시리즈도 필요해 보인다. 만화에서 흔히 시도하듯이, 저학년 주인공에서 시작해서 나이를 먹어 가면서 다양한 체험을 겪으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기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울러 교사들이나 학생들이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읽기 수업 보조 교재들이 필요하다. 가령, 학생들이 포털 사이트에서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정보를 접하지 않아도 되도록 신뢰성 높은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출판사 사이트에서 저자 정보를 아이들이 흥미 있는 다양한 형태로 제공한다든지, 작품을 읽고 토론할 만한 자료를 내려 받아 인쇄할 수 있는 PDF 파일로 제공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미국의 스콜래스틱 출판사의 경우, 독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북클럽을 운영 중이다. 1948년에 설립된 스콜래스틱 북클럽은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책을 공동으로 구매하고 적절한 책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그 결과로 생긴 구매 포인트를 활용하여 학급문고를 확충하고, 수업에서 이용할 수 있는 문서, 기사, 지도, 사진, 그림, 뉴스, 비디오 자료 등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창조적인 독서활동 모델을 개발하여 학생들에게 제안하고, 북 트레일러 경연대회 등을 열어서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한다. 또한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책을 보낼 수 있는 각종 기부행사를 직간접적으로 기획해서 실행하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연수프로그램 등을 제공하기도 한다.
교사들이 스스로 수업을 기획할 수 있도록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책들도 필요하다. 수업을 진행하기 좋게 책과 함께 활동지 등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고전의 경우에는 수업에 도움이 되는 자세한 해설서나 사전 등도 꾸준히 출간된다. 특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서평 모음이나 장르별, 주제별로, 연령별로 큐레이션이 잘되어 있는 북맵 등이 요구된다. 또한 학생들의 독후활동이 지나치게 독후감 중심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화 그리기, 북 트레일러 만들기, 연극하기, 답사하기 등 다양한 활동을 안내하는 책도 필요하다.
책 읽기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출판의 오랜 바람이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는 그 출발점에 해당한다. 이 출발이 위대한 한 걸음이 될 수 있도록, 아동출판이나 교육출판 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집자들의 꾸준한 관심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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