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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촛불과 출판


《기획회의》 올해의 출판계 키워드로 쓴 글입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지.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항쟁, 그리고 그 현장의 진실과 사상을 담은 한 권의 책. 그 기록과 기억이 다음에 오는 혁명의 불꽃이기 때문이지.” 『촛불혁명』에서 김예슬이 소개한 박노해 시인의 말이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더 편리한 도구가 출현한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던 출판의 눈앞에서 때마침 100만 촛불들의 열기가 오랜 적폐의 옹벽을 넘어뜨렸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넘쳐 나는 이 시대, 우리에겐 이 역동의 현장을 기록할 의무와 함께 담론의 용광로에 앞날을 쏟아 부을 출판 실천이 필요하다. 이러한 실천과 함께, 책의 본질은 기존 권력의 재생산에 불과한 ‘지식과 정보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혁명의 불꽃”, 즉 ‘인간과 사회의 변혁 도구’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묻는다. 세월호란 무엇인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으로 상징되는, 시민을 수동적 주체로만 여기는 명령-복종의 사회 체제가 낳은 참혹한 비극이다. 촛불은 무엇인가. 시민들이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으려고 권위주의적 정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결합한 구체제를 파산시킨 자율혁명이다. 우리 자신의 열망과 기쁨이 표현된 이 혁명이 자연스레 우리들의 새로운 책도 일구어 나갔다. 

촛불 이후, 국가와 사회의 전 영역에서 무엇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우리의 중대한 의무가 되었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 차병직, 윤재왕의 『지금 다시, 헌법』(로고폴리스) 등의 구간 또는 개정판으로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으로, 곧장 삶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무엇에 기대어서 이룩할 수 있는지는 무한한 과제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삶의 원리를 성찰하고, 세상을 바꾸는 실천을 북돋우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편집자들의 발 빠른 대응 속에서 이와 관련한 책이 거의 매주 쏟아졌다. 

이현재와 이원재의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이정전의 『주적은 불평등이다』, 최강욱의 『권력과 검찰』, 박성제의 『권력과 언론』 등이 국가와 사회와 경제의 주요 쟁점들을 따졌고, 김상봉의 『네가 나라다』, 박상훈의 『민주주의의 시간』과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등은 이 문제를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폭정』,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 등과 같은 번역서들도 사유의 거름으로 쓰기에 좋다. 

한편, 우파의 자부심인 근대화 자체를 다시 따져 보는 책도 나왔다.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설계자가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 반공 극우세력이 아니라 장준하와 《사상계》 그룹 등임을 학문적으로 논증한다. 친일과 반공으로 더럽혀진 우파가 아니라 합리적, 양심적 우파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의 대한민국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준거를 제시한다.

『바스라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다. “데모스의 지배를, 데모스에 의한 데모스의 통치 기예를 우리는 아직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제를 새롭게 창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 자신뿐이라고 실감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의 이 제도 아래에서? 실감 못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민주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제를 도출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를 통치하고, 오로지 우리만이 우리를 통치하도록 용납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우리의 민주제’를 위해서 노동의 땀과 고뇌의 피를 섞어서, 갈 수 있을 극한까지 ‘우리가 우리를 통치하는 세계’를 밀어붙여 보는 것, 그로써 미래의 촛불에 쓰일 희망의 연료를 충전하는 것, 이것이 한국출판이 오늘의 일로써 ‘미래의 문헌’을 만드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