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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기획회의》 신간토크 제455호(2018년 1월 5일)


강양구와 함께하는 《기획회의》 신간토크. 최근 2주간 출간된 신간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필자가 이야기한 부분만, 살짝 매만져서 올릴 예정.




김숨, 『너는 너로 살고 있니』(마음산책)

“‘닿다’를 발음할 때면 혀끝에서 파도가 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매 순간,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땅속에 묻혀 소멸하는 순간까지, 그 무엇과 닿으며 사는 게 아닐까요.”

김숨의 소설에 임수진의 일러스트를 더한 서간체 그림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가 마음산책에서 나왔습니다.

무명의 여배우가 경주로 내려가 11년째 식물인간 상태인 한 여자를 간호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변화를 담은 작품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아무도 아닌 자’입니다. 한쪽은 ‘살아서 죽은 자’이고, 다른 쪽은 ‘죽은 듯 사는 자’이니까요.

‘닿음’이 끊겼을 때, 인간은 이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인간(人間)이 ‘간(間)’을 잃으면, 인(人)이 아니라 무(無)가 되는 거죠.

두 사람은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표상이죠. 이들이 공명하면서, 얼굴을 찾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마음의 갈피를 만지작거리는, 김숨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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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정, 『알제리의 유령들』(문학동네)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올해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은 황여정의 『알제리의 유령들』입니다. 「알제리의 유령들」은 희곡 제목입니다. 이 희곡을 매개로 4명의 주인공이 제각각 기억을 환기하고,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한 자리에서 같은 것을 겪고도 기억이 다르다면,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 개인들이며, 그들조차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아마도 문학은 그렇게 기력이 다한 후에 오는 것이겠죠. ‘드디어 등단’한 작가답게, 격자구조에 다중시점까지 활용해서 극도로 복잡해진 플롯을 끌어가는 솜씨가 있습니다. 새로운 작가의 등장은 언제나 경탄하고 축하할 일이죠. 여담으로, 황여정은 황석영의 자녀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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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교양과 광기의 일기』(한겨레출판)

백민석의 장편소설 『교양과 광기의 일기』도 나왔습니다. 일단, 독특한 형식에 눈길이 갑니다. 

짝수 페이지는 40대 소설가인 ‘나’가 써 가는 ‘교양’의 일기, 홀수 페이지는 10대 소년이 쓴 ‘광기’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가지 일기가 교차하면서, 우리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 즉 ‘나’로서 규합된 합리적 질서와 그 여백을 이루는 파괴적 본능을 보여줍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사실이다. 간혹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사실이 아닌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먹고살기 바빠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므로 삶이 되지 못한다.”

소설의 독특한 형식은 “사실의 세계” 속에서 “사실이 아닌 세계”를 드러내려는 미학적 장치이겠죠. 작가의 내면에는 “전쟁놀이와 광란의 섹스를 좋아하는 10대 소년”이 살고 있는 걸까요. 벌써 스물다섯 해를 지켜봐 왔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성의 독재로 간신히 짓눌러 놓은 욕망의 폭력성을 해방하고 싶은 것이겠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험악한 탐색입니다. 전 항상 그 결과가 궁금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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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희, 『루쉰 : 청년들을 위한 사다리』(마리서사)

“후배들이 이 사다리를 딛고서 더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설령 내가 짓밟힌다고 한들 무엇이 아쉽겠는가! 중국에서 사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이가 나 말고 또 얼마나 있겠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타고 갈증을 일으키는 작가 루쉰의 평전이 나왔네요. 중문학자 조관희가 쓴 『루쉰 ― 청년들을 위한 사다리』(마리서사)입니다. 공들여 쓴 입문서로 루쉰의 팬이라면 기꺼이 소장할 만한 책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과 세상의 혁신에 온 시간을 쏟았던 루쉰의 삶은, 피로 쓴 듯한 그의 작품을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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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번역전쟁』(궁리)

이희재의 『번역전쟁』(궁리)을 주목해 읽었습니다. 번역이란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현실과 의식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나의 현상을 어떤 말로 가리키느냐에 따라서 사실이 왜곡되기도 하고 새롭게 가공되기도 하고 창조되기도 하죠.

가령, ‘privatization’은 공동체가 함께 쓰는 공공자산을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독점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착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그 뜻을 살려서 ‘사유화’로 옮겨야 하지만, ‘민영화’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이 현상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을 착각에 빠뜨립니다. 

저자는 오랫동안 번역가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번역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허위를 폭로하고, 때로는 새로운 번역어를 제안합니다. ‘포퓰리즘’은 그 참뜻을 반영하여 ‘서민주의’로 옮기자는 식입니다. 언어의 문제이면서, 또한 반드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한 번역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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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 『을의 민주주의』(그린비)

진태원의 『을의 민주주의』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자 진태원은 서양 정치철학, 특히 프랑스 정치철학에 대한 깊은 공부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한 이론적 전복을 시도합니다. 제목 그대로, ‘을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이룩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을’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독자적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구축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그 일에 어떤 난점이 있을지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주체의 동등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안과 밖, 우리와 남 같은 구획을 설정할 때에만 비로소 제도는 작동합니다. 여기에서 일종의 모순 같은 게 생깁니다. 민주를 외치면서 일어선 사람들이 ‘다른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가령,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은 ‘비국민의 존재’를 가정할 때에만 성립됩니다. 

‘국민’ 자체가 이념적으로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임을 고려하면, 더욱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국민이라는 말은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는 겁니다. 게다가 그 을이 병에게는 다시 갑이 됩니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의 동등성을 선언할 때, 자칫하면 그 안에서 다시 어떤 위계의 은폐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민주정치는 은폐된 위계를 드러내 해체하고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를 이룩할 때 비로소 작동합니다. 그렇다고 질서를 강조하면 동등성이 사라지면서 다시 지배-피지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 경계를 저자는 ‘갑’과 ‘을’의 관계로 치환하여 호명한 후, 갑과 을이 평등해지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로 설정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무정부적 시민성’을 가진 존재를 민주정치의 새로운 주체로서 일으켜 세운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주체는 국민도 아니고, 민중도 아니고, 인민도 아닌, 모든 ‘을’이라는 것이지요. 그때그때의 을이 정치적 주체가 되고, 연대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제안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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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윌슨, 『네이버후드 프로젝트』, 황연아 옮김(사이언스북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론과 현실의 만남입니다. 윌슨은 진화에서 개체보다 집단에 주목하는 ‘집단 선택설’의 주창자입니다. 능력을 갖춘 이기적인 개체가 진화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이타적인 집단이 더욱더 잘 생존해서 결국 진화에 성공했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이론을 자기가 살아가는 도시에 실제로 적용해 봄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실천을 전개합니다. 미국 뉴욕 주의 빙엄턴 시를 배경으로 5년간 친사회성 설문조사를 전개한 후, 사회성이 높은 지역은 높은 지역끼리, 사회성이 낮은 지역은 낮은 지역끼리 서로 이어 일종의 등고선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성 높은 지역이 여러모로 살기 좋은 곳이며, 사회성 낮은 지역은 우범지역이라는 점이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이에 근거를 두고 저자는 진화생물학 이론에 맞추어 사회성 낮은 지역의 사회성을 끌어올리는 일련의 실천을 기획해서 실천합니다. 이것이 네이버후드 프로젝트입니다. 서로 돕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사회성을 고양할수록 집단의 생존력이나 자생력이 강해진다는 진화생물학적 통찰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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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이김)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아이들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양육가설입니다. 흔한 상식이죠. 하지만 실제로 연구해 보니 이는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치는 건 부모가 아니라 또래집단이었습니다. 부모의 영향은 미미한 수준이었죠. 또래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느냐, 누구와 같이 사회화 훈련을 받느냐에 따라 다른 인격이 형성된답니다.

이는 진화생물학적으로 타당합니다. 수렵채집 시기에는 부모가 항상 아이를 보살피지 못하잖아요. 또래집단과 함께 똘똘 뭉쳐 있으면, 설사 부모가 없더라도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보다는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누구와 협력하느냐가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유전자에 각인된 거죠.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부모보다는 친구가 중요하죠. 따라서 부모의 역할이 별로 없으니 아이들에 대한 간섭을 자제하라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가 또래집단에서 호감을 살 수 있도록 깨끗한 옷을 입혀 내보내는 것뿐이라고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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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호로비츠의 『소리의 과학』, 노태복 옮김(에이도스)

세스 호로비츠의 『소리의 과학』(에이도스)을 추천합니다. 소리에 관한 제대로 된 과학 저서는 이 책이 거의 처음입니다. 소리란 무엇이고,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진화의 과정에서 소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각이나 후각, 미각이 없는 동물은 있어도 청각이 없는 동물은 없습니다. 동굴새우 같은 걸 생각하면,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청각일지도 모릅니다. 소리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내는 동물일수록 더 복잡한 행동, 더 사교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환경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으므로 생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부제인 ‘청각이 어떻게 마음을 만드는가’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소리와 의식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소리를 수용해서 해석하는 능력이 뇌의 진화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소리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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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D. 카플란, 『지리의 복수』, 이순호 옮김(미지북스)

로버트 카플란의 『지리의 복수』(미지북스)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국제관계 저널리스트로 명망 높은 로버트 D. 카플란이 지리학과 국제정치의 관계를 파헤친 책입니다. 

이동 기술이 발전하면서 국경 같은 지리적 요소의 중요성을 우리는 흔히 잊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자는 실제로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리이고,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리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가령, 1995년 보스니아, 1999년 코소보의 야만적 사태에서는 서구 제국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산악 지역 특유의 지리적 요건 때문에 군사개입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인위적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은 지리적으로 볼 때 허약한 경계라고 말랍니다. 산맥이나 강 같은 지리적인 단절 요소 없이 생긴, DMZ 같은 인위적 경계는 아주 쉽게 무너진다는 겁니다. 남북한 통일의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한 단계 높아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지리의 눈으로 보면, 세계가 달라 보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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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대담한 작전』, 김승욱 옮김(프시케의숲)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도 추천합니다. 1098년부터 1536년까지 약 450년 정도 되는 시기에 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진 여러 특수작전들을 분석한 책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첫 책이기도 합니다. 

탄탄한 자료조사에 근거를 둔 학술서이지만, 스토리텔링에 탁월한 저자답게 전쟁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특수작전은 영화에서 보듯이 우아하고 깔끔하게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죠. 약자가 강자를 극복하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 하니까요. 

협잡, 음모, 속임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치졸한 짓이 벌이집니다. 그 대신 성공의 열매는 달콤합니다. 불리했던 사태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으니까요. 동서양 중세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밀리터리 마니아나 판타지 소설 작가 등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이루어진 사실은 만들어진 상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데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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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연,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레디앙)

이범연의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레디앙)도 주목하고 싶은 책입니다. 저자는 서울대 재학 중 대우자동차에 위장 취업해 노동자로 3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대기업 노조라는 틀을 든든히 세상에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던 지난 세월을 회고합니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왜 ‘대기업 노조놈’들이 되었는지 반성하며 타락을 경계하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노동운동이 혁신되려면 남성 노동자 중심,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노조를 떠나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중소기업, 여성,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등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서로 협력하는 새로운 만남을 조직하자고 주장합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30년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6월 항쟁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있었던 노동자대투쟁도 중요합니다. 이 투쟁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이후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