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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편집자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출판 전문 잡지인 《기획회의》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글은 오래전에 써 두었고 투고한 지 며칠 된 글입니다. 한기호 소장님 블로그에 가 보니, 드디어 책으로 나왔기에 제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저는 오래전에 여러 선후배들 앞에서 편집자로 정년퇴직하겠다고 서언한 바 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의 무게를 점점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정년이라는 개념은 요즈음 분위기에서 상당히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나, 책을 내는 일이 하나의 중요한 직업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면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무척이나 행복할 겁니다.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편집자라는 직업은 아직 그 직업적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선 책에 관련된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총체적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척박한 환경에서 사장과 필자와 독자에게 시달리다가 스스로 소진되는 소시민 이미지도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저는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현실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현장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몇몇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서울북인스티튜드(SBI)에서 계속 강의를 하면서 한국 출판계가 편집자라는 직업의 자부심을 부풀리는 데 치중하느라(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지난 20년이 그렇습니다.) 편집자의 실제 노동 조건, 편집자의 직업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제 과거와 현재, 주장과 반성 사이의 문턱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편집자론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일을 하고 있는, 하고 싶은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하고 소원합니다. 

 

편집자로 산다는 것


김학원.정은숙.강주헌 외 지음/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최근 출판계에서 단연 화제가 된 책은 김학원, 정은숙, 강주헌, 이홍, 변정수, 정민영의 강연과 그 후의 질의응답을 풀어 엮은 『편집자로 산다는 것』(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2)이다. 필자들 대부분이 그동안 출판계에서 이런저런 일로 마주쳐 그 생각을 대개 아는 분이기도 하고, 내용도 이전에 그들이 쓴 단행본을 통해 많이 읽은 것들이어서 하룻밤 만에 모조리 읽어 버렸다.

‘지사’처럼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어깨에 힘을 꽉 주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출판하기. 읽고 난 후 왠지 가장 먼저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물론 출판을 둘러싼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지만, 편집자의 일이란 현세지옥에 처한 듯한 마음을 품은 비장한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야 잘할 수 있는 것일까? 랄랄라, 랄랄라, 남이야 뭐라 하든, 세상이 뒤집어지든, 나는 오늘도 원고 읽고 책 만들고 월급 받고 잘 살아간다네 하는 즐거운 편집자는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즐거운 편집자를 거부하는 어떤 멘탈리티가 출판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편집자로 일한다는 것’ 대신에 ‘편집자로 산다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지만, 편집 ‘일’에 대한 저자들의 인식이 현재 우리 출판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넘기더라도 미디어 빅뱅이 일어난 현재의 상황에서 한국 출판이 맞닥뜨린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과 오랜 경험이 어우러진,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넘치는 논의를 만날 수 있다. 글마다 수없이 밑줄을 그어가면서 스스로 부족한 점을 점검하고 되살펴볼 기회였고, 여백마다 메모를 하면서 책과 출판의 미래를 설계해 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서 이 책의 저자들에게 온전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책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마음 한쪽에서 의혹의 구름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저자들 중 몇 분의 ‘편집자로 일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나와 달랐고, 그것이 현재의 출판 현실에서 편집자의 이미지를 잘못 그리게 할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편집자는 지식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직업 중 하나이며, 대부분 출판 자본에 고용되어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전문가일 뿐이다. 편집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우선 해결할 문제는 이 직업의 일을 더 분명하게 설정함으로써(Job Description) 그에게 씌운 무리한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이다.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출판에 경험이 있고 역사출판에서 비전을 그리고 싶은 사람들을 찾고 있는데 그런 눈으로 사람들을 찾다 보니 정말 힘들어요.”와 같은 발언이나 “어떤 출판사든 개인에게 직장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던져주지는 않잖아요. 본인 자신이 브랜드 아닌가요?”와 같은 반문이나 “이제 편집자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와 같은 선언은 그 맥락이나 취지를 한껏 감안하더라도 어쩌면 스스로 이 직업에서 누군가를 고용하는 입장에 있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적 출판구조 속에서 뚜렷한 직업적 전망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이야기할 때, 초인적인 편집자, 즉 시장의 온갖 요소를 통찰해 비전을 마련하는 능력에, 사장의 가치와 적절하게 맞추어 회사 생활까지 잘하는 유연한 사회성에, 작가처럼 책을 만들 때마다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태도를 겸비한 만능 편집자라는 관점에서 풀어가는 것은 전혀 정당하지 않다. 그런 편집자 이미지는 민주화라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수많은 이들이 출판 운동에 뛰어들던 1980년대나 그 잉여들이 아직 출판계로 유입되던 1990년대에도, 그리하여 편집 노동에 ‘닥치고 헌신’이라는 구호가 덧씌워졌던 시대에도 술자리 농담으로나 생각해 볼 관념론의 소산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편집 노동을 ‘신성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특수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고법이 출판계 내부에 통용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지만, 출판계의 많은 이들은 편집자라는 직업을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수많은 직업과는 달리, 돈을 바라고만 일하지 않는 ‘신성한’ 직업으로 정의하고 싶어 한다. 그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편집자의 직업적 자존심을 이루지만 동시에 오늘날 극명한 모순의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전자책 같은 외부 충격이 슬쩍 가해지자마자 편집자의 정체성에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고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마침내 대붕괴의 전조가 나타나 버린 것이다. 요즘 출판계 여기저기에서 편집자란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물어대는 것이 그 한 증거이다. 그러나 ‘정신 승리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제대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는 법이다. 출판사가 편집자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런 가치를 주지 못한 출판사의 잘못이지 스스로 브랜드가 되지 못한 편집자의 잘못은 아니다. 좀 더 쉬운 전직 조건을 직업 자체의 조건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이 모두 브랜드인 편집자로 이루어진 출판사, 참 멋진 생각이지만, 함께 꿈꿀 만한 공상은 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직업이 이런 걸 일하는 사람에게 요구한단 말인가.

편집자가 어떤 분야의 출판에 대해 비전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때 그 분야에서 반드시 비전을 그려내야 하는 것은 출판사이지 편집자 자체는 아니다. 어떤 출판사가 세분화 시장에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싶어 하면, 그 일을 맡은 편집자는 시장을 조사하고 독자 니즈를 찾아내 이를 충족할 방법을 고민하고, 필자와 만나 대화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의하고, 타사와 경쟁을 분석해 성공 요소를 도출함으로써 하나의 비전 지도(사업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다. 이어지는 치열한 브레인스토밍과 거듭되는 조사와 재설계, 청탁과 편집과 디자인과 인쇄와 제본의 연속 노동을 통해서 그 비전은 한 출판사의 전체 능력이 집약된 물성으로 구체화되고, 시장으로 나가 마침내 독자의 선택을 받는다. 아이디어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편집자의 몫일 수 있지만 비전을 그리는 것은 출판사 전체 또는 경영진의 몫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이런 일을 하고 싶을 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분야를 전공했거나 비전을 품은 편집자가 아니라 시장을 분석해 차이를 도출하고 상품을 개발한 후 적절히 포지셔닝하는 능력을 갖춘 숙련된 편집 노동자이다. 그 분야를 전공했다면 다만 개미 발가락만큼 유리하고, 비전을 품었다 해도 성공 확률을 살짝 높일 수 있을 뿐이다. 그게 편집자의 자질과 뭐 그리 큰 상관이 있단 말인가.

편집자라는 직업을 말할 때에는 ‘비전’이나 ‘브랜드’나 ‘태도’와 같은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 출판사 스스로가 계발 가능하고 개선 가능한 ‘일’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고칠 수도 없으며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은 바꿀 수도 없다. 툭 터놓고 말해 보자. 오늘날 한국 출판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실제로 시장을 분석하고 니즈를 발견하고 이를 물성으로 구현할 능력을 갖춘 ‘숙련된 편집 노동자’들이며, 그들의 편집력을 끌어올려 오로지 책의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실력 있는 경영자’들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 편집자로서 숙련성을 높여 봐야 자신을 고용해 줄 만큼 식견 있는 경영자는 오히려 급격히 줄어들어 허울뿐인 임프린트 대표나 1인출판 사장으로 내몰리는 현실이야말로 편집자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위협해 온 게 아닌가.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편집자는 차이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책의 가치에 복무한다. 그는 흘러 다니는 문자 속에서 인류가 주목해 읽고 서로 나눌 만한 더 질 높은 정보가, 지식이,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그 정보와 지식과 지혜에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편집하고 세심하게 디자인한, 새로운 차원의 문서를 창조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제한된 자원을 활용해 독자들의 삶을 가치롭게 하기 위해 책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에서 끊임없는 혁신을 고민하고 실행한다.

편집은, 한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기이한 재능을 가진 천재와 그 친구들이 벌이는 매혹적인 마술쇼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이를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책을 만드는 것으로 그 일을 해 내고 싶은 사람들이 벌이는 특별한 활동이며, 책을 좋아하는 마음과 책을 둘러싼 가치사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로부터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행할 능력이 있다면 모두가 할 수 있는 과학적 과정이다. 책이 다른 상품과 똑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듯이, 편집 노동 역시 높은 학습능력과 시행착오의 축적을 통해 숙련되는 일상의 여러 노동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부정할 때 우리는 바다로 가야 할 편집자의 문제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게 된다.

편집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른 노동자들처럼 편집자 또한 노동의 장기 지속적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책과 출판의 기나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온 것이다. 편집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여기는 출판은 자신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편집을 열정의 문제로, 태도의 문제로, 끈질김의 문제로, 가치관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자신이 아직 과거에 속해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타고난 편집자란 신기루는 출판의 사막에서 결코 쫓아서는 안 될 헛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편집 노동이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러나 정작 편집 노동을 재정의하려는 순간에 이르면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려 하는 게 문제다. “지금은 책 잘 만드는 편집자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에요. 그건 이미 누구나 할 줄 아는 겁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3개월, 6개월이면 다 따라합니다.” 혹시 아직도 책 만들기를 ‘교정 교열’이나 ‘디자인’ 정도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산업들처럼 출판 산업 역시 제품 전략을, 즉 책 자체를 최고의 전략으로, 때때로 유일한 전략으로 사용한다. 한 편집자의 책 만들기는 그가 저자의 콘텐츠와 시장의 니즈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찰한 후 이를 물성으로 구현하려는 전략적 사고의 결정체이고, 편집자가 하는 일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책을 잘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독자들을 미치게 하는 책, 가격․디자인․품질 등 모든 면에서 남들이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책을 만드세요. 그게 다예요.”라고 말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을 만드는 것은 원고와 시장의 분석을 통해 얻은 통찰을 물성으로 구현하는 물리적 과정의 연속이다. 출판이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는 한 이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와 함께한 출판의 놀라운 역사 속에서, 편집자는 언제나 저자와 독자를 위해 책의 인터페이스를 혁신하고 쓰기와 읽기를 둘러싼 경험을 새롭게 창조하려고 책의 사용성을 끈질기게 탐구해 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편집자의 일이 이 자리를 벗어날 리 전혀 없다. 저자와 대화하고 원고를 배열하고 문장을 다듬고 디자인을 고민하고 인쇄와 제본을 통해 책의 물성을 달성하는 편집 노동 바깥에서, 독자 가치를 자기 일의 중심에 두고 그들을 위한 특별한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기획하고 광고 홍보 전략을 짜는 편집 노동 바깥에서 편집자를 위한 가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편집의 문제를 책의 물성 바깥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는 출판의 불안한 미래를 해결할 수 없다. 저자의 능력을 내용에 집중하게 만들고, 독자의 시간을 책 읽는 일에만 쓰게 하는 것, 편집자가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지점은 이곳뿐이다. 다른 건 모두 부차적이다. 편집자의 일은 오직 책을 잘 ‘만드는’ 것이다. 그가 시장을 분석하고 방향을 설정하며 트렌드를 고민하는 건 순전히 이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이다. 한 편집자의 가치는 그저 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래의 어느 날 태어날, 전천후한 능력에 바른 품성까지 갖춘 메시아적 편집자는 없다. 편집자는 오직 만들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편집자의 일을 물으려 한다면, 책을 둘러싼 시장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을 가졌는지, 경쟁을 극복하는 출판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지, 원고를 파악해 개선할 수 있는 실무적인 능력이 있는지, 전자책과 같은 첨단의 책 기술을 습득했는지 등을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지속적인 직무교육과 표준화된 편집 매뉴얼 등을 통해 학습되고, 시간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숙련될 수 있다. 이 사실을 믿는 출판만이 아마 새로운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당장 수정되어야 한다. “편집자로 일한다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