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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이원 산문집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책을 오랫동안 스스로 만들지 않게 되면 원고의 세부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감각들이 서서히 무뎌진다. 저자의 문장을 이루는 언어들을 쉼표 하나가 부각하는 그 사소함 숨결까지 함께 느껴 가려면 단지 독자가 되어 책으로 읽는 것보다는 역시 반복적 교정 작업이 최고다. 문장이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단숨에 읽어 가야 할 곳과 멈추어 한없이 느리게 쉬면서 읽어 가야 할 곳을 피부에 새기듯 확연히 느끼려면, 역시 쉼표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문장을 조심스레 건드려 보거나 부사와 형용사의 위치를 이리저리 조정하면서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는 게 가장 좋다.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과 함께 저자의 고조된 언어 감각을 내 것으로 만들고, 그를 통해 마음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벼려 내는 것. 그렇다. 노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너무 오래 쉬었다.

회사 일 전체를 챙겨야 하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직접 책을 만들어 본 날이 까마득하게 되어 버렸다. 벌써 네다섯 해 가까이 된 것 같다. 예전에는 신입 사원들이 들어오면 그들이 한번 본 교정지를 나 스스로 되보아서 돌려주며 교정과 교열을 포함한 편집 작업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 일도 벌써 오래전 추억이 되어 버렸다. 원고를 욕심내는 마음이 눈에 비쳐 일종의 살기를 띠고 있으면 후배 편집자들이 흠칫 하면서 자기 원고를 꽉 끌어안으면서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느낌만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달라고 하면 홀가분한 표정으로 훌쩍 넘길 것으로 믿는다.) 어쨌든 출판계에 들어와 편집자로 일한 지, 내년 5월 1일이면 꼼짝없이 스무 해가 된다. 여기서 수많은 선배들과 후배들, 친구들을 만났고, 편집자로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책을 직접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계속 허전해져서 안절부절못하곤 했는데, 이번에 마음을 굳게 먹고 후배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책 한 권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김수영 40주기 기념시집 『거대한 뿌리여, 기괴한 청년들이여』(민음사) 출간 기념회에서 낭송하는 이원

문단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시인 이원의 첫 산문집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둘이는 책을 한 권 진행해 보기로 이야기를 나누어 왔는데, 이상하게도 실제로 함께 책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건 아마도 나의 분주함과 이원의 신중함이 만든 기이한 어긋남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이원의 저작물이라곤 남들과 함께 쓴 책에 꼭지 글을 실은 것을 빼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아래의 시집 세 권이 고작이다.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이원 지음/문학과지성사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이원 지음/문학과지성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 지음/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시와 비평을 통해 만날 때는 시적 혁신을 일으키려는 좋은 동지였고, 만나서 차나 술을 마실 때에는(그러나 이원은 사실 거의, 전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원의 첫 산문집을 욕심내는 것은 편집자로서 나의 당연한 자만심(이 책은 내가 제일 잘 만들 수 있어!)일 수 있었는데, 내가 조심스레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원은 내게 그 작업을 맡기는 것을 조금도 우려하지 않고(내 부산한 일정에 따른 수없는 작업 중단과 지지부진한 작업 지연 등등)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책의 출간 기한은 내년 4월까지 완료할 예정이고, 디자인 작업은 북디자이너 김형균 씨가 기꺼이 맡아 주기로 했다. 가끔씩 내 블로그(와 민음사 카페)를 통해 그 진행 과정을 공개하려 하는데, 이는 저자와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협업이 책을 어떻게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가를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억지로 일정을 짜내서라도 한 달에 한 번쯤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려는 훈훈한 음모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세상은 월요일, 오후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보내온 산문집 원고는 지난 20년 동안 이원이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3월 초에 이원은 이 원고들을 시인 자신의 삶과 시에 대한 생각들을 담은 글, 이원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 장르인 그림과 사진에 대한 글, 다른 시인과 소설가에 대한 글 등 세 덩어리로 나누어서 보냈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나는 이원의 산문들을 꼼꼼하게 읽어 나가면서 메모하고 주석을 달면서 편집 방향을 정리한 후 4월 중순에 이원을 다시 만나서 내 의견을 큰 그림만 그려서 개념적으로 전달했다. 아래는 이원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후 정리한 편집 일기다.

이 원고 더미에 실린 글에서 나타난 이원의 장점은 일상성에 대한 집요한 거부에 있다. 그녀의 삶은 거의 모조리 언어로 이루어진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이벤트로서의 삶을 일상적으로 지속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일 터인데, 이원은 끝내 그 일을 해내고 있다. 순간적으로 강렬해지는 삶과 그 강도 높은 삶을 끈질기게 기록하는 기억 기계로서의 언어들, 그리고 그 순간과 언어를 어떤 흔적으로 새겨 두고 싶어 하는 경험 기계로서의 신체들로 이루어진 삼각형이 갈수록 뾰족해지면서 서로를 굴려 가는 장엄한 장면들이 그녀의 에세이 곳곳에서 빛을 뿌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림을 이야기할 때도 이원은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단어의 변주, 그것이 환기하는 육체의 풍경들이 전경화하여 작품을 이룩한다. 그것이 그림에 대한 무작정 해설로 떨어지거나 작품의 구체적 이미지 없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나열로 나타날 때 갑자기 그 기록은 시시해진다. 따라서 이 책은 이원식 사유의 강도를 살리기 위해 작은 조각들로 분절된 후 일상성이 틈입할 어떤 공간을 배제하고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재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가제는 [이원의 생각 미술관]이다. 하나의 독립된 작품처럼 존재하는 각각의 사유 조각들을 정교하게 배치한 후 관객들을 초대해 그 사이를 걷게 하는 큐레이터 같은 역할이 편집자에게 요청된다 그 작업은 더디겠지만 아마도 흥분될 것이다. 

분절된 면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가는 저자의 작업과 그러한 저자의 작업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목소리를 증폭해 가는 편집자의 노력과 이를 함께 물성으로 구현해 가는 디자인 작업이 한데 어우러지는, 치열함의 높은 온도 속에서 반짝이는 단단한 도자기 같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원에게 했고, 이원은 내 작업의 뜻을 기쁘게 승인해 주었다. 그 직후에 나는 미술부 김형균 차장을 만나서 수많은 판면으로 이루어진, 그 안에서 저자의 언어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걸려 있는 재밌는 책을 구조화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형균 씨는 디자인 작업의 난해성 때문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금세 활짝 웃으면서 재밌는 작업 같다면서 틈나는 대로 작품을 구상해 보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와 같이 일하면서 그의 창조성과 놀라운 집중력에 늘 감동을 받아 왔는데, 재작년 그가 디자인 전시회를 열었을 때 도록에 글을 한 편 써서 기념한 적도 있었다. 그가 이 힘든 작업을 맡아 주겠다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이제 다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소년처럼 천진하게 웃지만 창조성 넘치는 북디자이너 김형균

마지막으로 나는 내 편집 작업을 보조해 줄 에디터 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원이 내보내는 사유의 강도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춘 동시에 꾸준한 작업과 즐거운 채근으로 나와 저자와 디자이너를 기쁘게 부추겨 줄 후배가 필요했다. 아마 실제로는 이 사람이 없다면 모든 작업은 불이 꺼지듯 일시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여러 후배들 중에서 한국문학 팀의 2년차 편집자인 박혜진 씨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써 오면서 단련된 감수성과 늘 사람을 기운 차게 하는 특유의 활기가, 정지와 운동을 반복하면서 전체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이 일을 맡기에 적당했다. 그래서 이달 초 박혜진 씨를 데리고 이원과 두 번째 미팅을 하면서 얼굴 도장을 찍었다. 우리는 미팅을 하면서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편집. 즉 이미지화한 사유, 작품으로서의 사유를 보여 줄 수 있는 편집.”이라는 방향을 공유했고, 내년에 이 책을 내면서 할 파티에 대해서도 상상하면서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박혜진과 함께한 시인 이원


이원과 나

나는 이원이 글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말을 믿는다. 그렇다. 지금 나는 한 마리 양을 간신히 손에 쥐었다. 이 양을 얻게 될지는 앞으로에 달렸다. 시작이다.

‘나는 한 마리 양을 위해서는 99마리 양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걸었던 그 마법의 주문은 꽤 오래 날 지탱시켜 주었다(아니, 지금도 그러하다). ... 그때는 한 마리 양을 갖는다는 것의 매혹만으로 부풀었지 99마리 양을 포기하는 것의 고통은 생각지 못했다. 아니, 한 마리 양을 갖는다는 것은 그 양의 어둠과 울음까지도 나 혼자 갖게 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이다. 나는 한 마리 양을 갖게 되었고 그 양의 어둠과 울음을 보듬을 손은 되었으니까.